[故 탁명환(철학․56)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소장] 일평생 신흥종교, 기독교 이단 연구에 몰두
[故 탁명환(철학․56)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소장] 일평생 신흥종교, 기독교 이단 연구에 몰두
  • 전북대신문
  • 승인 2019.03.29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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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종교와 만남, ‘계룡산 출입기자’로 유명
저서 필독서로 꼽혀…해외 곳곳 강의 다니기도
아들 탁지일 교수, “아버지의 일 마무리 할 것”

이단사이비종교 침투 역사는 일제강점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들은 정국이 혼란하고 사회가 불안한 시기들을 틈타 이득을 얻는 경우가 많아 개화기에도 이들의 활약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단사이비종교 교주들은 신의 뜻이라며 신도 수 백 명을 성적으로 폭행하고 다수를 살상하는 등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 왔다. 하지만 누구도 이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지 못했다. 교주에 대한 신도들의 믿음이 절대적이라 이를 문제시한 이들은 누구든 생명의 위협에 견줄 만큼의 상황을 각오해야 했다. 너무도 위험천만해 아무도 가지 않았던 그 길을 담담히 걸은 이가 있다. 바로 故 탁명환(철학․56)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소장이다.

미션스쿨인 전주신흥고등학교에 다녔던 탁명환 소장은 재학시절 덕진고아원, 우전보육원에서 선교사와 함께 전쟁고아를 가르쳤다. 고등학교 재학 기간, 윌리엄 린튼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본격적인 기독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영주교’라는 신흥종교가 가난한 산골마을을 휩쓸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몸과 마음, 재산까지 빼앗는 신흥종교의 위험에서 작은 마을들을 지키고 싶다는 소망 하나로 매주 주말 탁 소장은 스미스 목사를 따라 산골짜기로 향했다. 시골교회 무명 전도사가 된 그는 산간벽지인 ‘양야리’의 개척교회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밤늦게까지 설교를 준비하고 새벽 및 주일 예배와 주일 학교까지 도맡아했다. 그리고 월요일 첫 차를 타고 전주로 다시 나와 평일은 학교를 다녔다.

우리학교 철학과에 입학하고 나서도 대학 기독교 동아리 기독학생회장, 학도호국단 부위원장을 겸하며 열심히 활동해나갔다. 완주군 신리국민학교를 빌려 야간에는 윤리와 영어를 가르쳤다. 탁명환 소장은 그의 저서에서 당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물불 가리지 않고 뛰다보니 설교하다 강단에서 쓰러진 일도 있었다.

군 입대해서도 그의 신앙적 열정은 시들지 않았다. 낮에는 부대 근무, 저녁엔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이어갔다. 종종 대구일보, 영남일보에 글을 써서 발표하기도 했다. 제대 후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공부했지만 형편 상 학업을 중단한 뒤 그가 처음 입사한 곳은 한국복음신보사였다. 그는 항상 ‘현장, 피해자 중심’으로 취재했다.

우연히 고등학교 친구의 가정이 이단종교로 풍비박산 난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본격적으로 이단연구에 몰두한다. 그리고 맡은 취재가 바로 여러 단체들로 위장한 이단종교 폭로 기사였다. 탁명환 소장은 기사를 통해 해당 단체가 사단법인체로 간판을 바꿔 달며 기성 교회에 침투해온 실상을 낱낱이 밝혀냈다.

기독신보 취재부장 시절에는 신흥종교 메카로 떠올랐던 계룡산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취재를 위해 신도로 위장하고 6개월간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다. 현장을 사진에 담고 오가며 만난 이들과의 인터뷰를 녹음하며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그들의 교리서를 분석하고 피해자 가족들을 통해 들은 정보를 취합해 하나의 흐름으로 읽어냈다. 그렇게 그는 일주일 대다수를 집이 아닌 현장을 전전했다. 초기 신흥종교에서 시작된 그의 연구는 시간이 흐를수록 반사회적, 범죄적 신흥종교 연구로 반경을 넓혀갔다.

그가 이 곳 저 곳 열심히 뛴 땀방울의 결실은 잡지 ‘현대종교’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1981년 4월에는 한국예수교 협의회(KCCC) 기관지인 월간 ‘성별’을 인수한다. 그리고 1982년 ‘성별’을 ‘현대종교’로 바꾸고 사이비종교 탐사보도를 계속했다. 목적은 신흥종교를 연구하는 정론잡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 개신교계 신흥종교 전문연구자로 활동하면서 한국신학대학, 목원대학, 서울신학대학, 고려신학교 등에서 강의를 했다. 또한 1970년 1월에 국제종교문제 연구소를 설립했다.

사회에 노출되지 않던 이단종교가 기사화되니 사람들도 점차 관심을 보였다. 탁명환 소장은 그간 취재할 때 찍었던 사진들을 모아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당시 언론사들은 ‘이색사진 전시회’로 사진전을 크게 보도했으며 해당 교주들도 관람을 오기도 했다.

그의 저서인 『한국의 신흥종교』는 1972년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더니 1999년 『한국의 신흥종교』 1-3권이 중앙일보 종교부문 필독서로 꼽혔다. 탁명환 소장이 집필‧출간한 『기독교 이단연구』 등 30여권의 신흥종교운동과 기독교이단 관련 서적들은 여전히 교회나 신학교에서 기본 교재로 쓰이고 있다. 특히 『기독교 이단연구』는 여러 언어로 번역돼 학계에서 널리 참고 되고 있으며 당시 사회적으로 이단사이비종교 문제가 있을 때 언론, 국가기관에서 그를 찾아와 문의할 정도로 공신력 있는 활동을 펼쳤다.

탁명환 소장은 그를 찾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미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이단종교들에 유입되는 경우가 많아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한국교민이 많은 곳을 찾아가 관련 강의를 통해 이단의 위험성을 알렸다. 그러던 중 1985년, 이단종교 신도가 자가용 아래 폭탄을 설치해 위해를 가한 일이 있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가 출강을 가면 그곳에도 신도들이 찾아와 난동을 부리거나 폭력을 행사했다. 청부 살해 위협을 당하기도 했던 그 시절, 이단의 위험성을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 하나로 하루하루는 버텼다. 아들 탁지일 교수는 “지방으로 취재와 강연을 다니며 바쁜 나날을 보내셨지만 집에 오실 때면 고민은 문밖에 두고 다정다감하게 자녀들을 대해주셨다”라고 덧붙였다.

폭탄 테러 당시 실명 위기에 처했던 그는 각막기증운동을 시작했다. 이어 안구기증뿐만 아니라 시신기증까지 실천했다. 괴한에 피습돼 1994년 운명을 달리한 이 후, 그의 시신은 세브란스 병원에 기증돼 해부학 실습용으로 사용됐다. 생전에 아버지가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있어 현재는 그의 세 아들이 아버지의 업을 이어가고 있다. 탁지일 교수는 “‘현대종교’가 필요 없는 세상이 돼야 한다”라며 “그 때까지 신속 명확하고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전했다.

유경희 객원기자

ace@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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