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의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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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대신문
  • 승인 2019.05.1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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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마음속의 어둠         양승현 국어교육·14


2. 폭력과 저항의 경계

눈을 떠보니 어느덧 아침이었다. 오빠는 이미 출근한 듯 집 안이 적막했다. 침대에서 늑장을 부릴 시간도 없이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서둘렀다. 주말 집회가 이틀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에 들러 처리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급하게 집을 나와 학교로 향했다.

아직은 한산하고 느긋한 거리에 나 혼자만 조급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급하게 서두른 덕분에 수업이 시작하기까지 아직 한참 여유가 있었다. 동아리방에 먼저 들렀다. 아무래도 신입생들에게 미리 가입 승인 문자를 보내놓는 것이 좋을 성싶었다. 가입 신청자 명단을 훑고서 휴대폰에 저장된 음성파일 목록을 살폈다. 우리 동아리에 가입하기 위해선 주변의 남성으로 하여금 페미니즘을 지지하도록 설득시키고 그 대화 내역을 녹음 파일로 제출해야 하는데, 작년 가입자 수를 훨씬 웃도는 인원이 녹음 파일을 제출했다. 그 중에는 고막을 찌르는 비명 소리나 욕설이 녹음되어 있는 파일,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등도 꽤나 섞여있었지만, 그딴 것들을 제외하면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작년부터 과하다 싶을 만큼 활발하게 뛰어다닌 영향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리 동아리 부원들 한 명 한 명의 진심이 전해진 결과인 것이었다. 괜스레 가슴이 뿌듯해졌다. 와중에 명단에 쓰인 이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어젯밤,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던 커플링, 반으로 쪼개진 그 커플링의 주인이었다. 음성파일 목록을 뒤적여 그녀의 파일을 재생시켰다.

… - ‘야, 네가 그러고도 나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냐? 피해 여성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데 나랑은 어떻게 사귄다는 거냐? 이 위선자 새끼야.’

- ‘또 시작이네. 그거 병인 거 알고는 있냐? 이 말 꼭 하고 싶었는데, 그거 정신병이야.’

- ‘내가? 피해자를 또 가해하는 범죄자 보다는 뭐든 낫지. 더러운 새끼.’ …

10초가 채 안 되는 대화였지만 음성에서 느껴지는 적의는 충분히 쓸 만했다. 비록 상대를 설득시키지는 못했지만 우리 동아리엔 오히려 이런 사람이 많아야 했다. 얼마 전 집행부 회의에서 그녀의 커플링까지 보여주며 가입을 승인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청했다. 어찌 되었건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활동에서 우리의 메시지를 더욱 강렬하게 각인시켜야 한다는 점이었다. 다행히도 다른 신입생들의 각오와 분노도 그에 못지않았다. 어느 때보다 동아리 회장으로서의 내 역할이 막중하게 느껴졌다. 이 사회에서 고통 받아 온 모든 여성들을 위해 난 그 분노와 적의에 기름을 부어야 했다. 난 누구처럼 외양만 그럴듯한 정의와 편협한 잣대를 들이밀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 언니, 신입생들한테 가입 승인 문자 보냈어요?

어느새 집행부 후배 한 명이 동아리방에 들어와 있다.

- 명단 한 번만 더 대조해보고 보내려고.

- 네. 아 참, 언니, 근데 이번 주 시위에 신입생들도 진짜 포함시키실 거예요?

표정을 살피니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이미 집행부끼리 결정한 사안을 되묻는 저의가 뭘까.

- 그게 좋을 것 같아서. 왜? 이미 만장일치로 결정 난 거잖아.

‘만장일치’라는 단어에 힘을 줬다.

- 아.. 그땐 다들 분위기가 그래서 저도 찬성하긴 했는데요. 혹시라도 시위에서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면 신입생들이 좀 불편해하지 않을까 해서요.

폭력적인 모습이라. 외부 사람이 보기엔 있을 수 있는 지적이지만 동아리원으로서 합당한 지적은 아니었다. 그동안 억압받고 상처받아 온 여성들의 ‘저항’을 불편해한다고? 그런 자들은 애초에 우리 동아리와 맞지 않았다.

- 시위 참가하기 전에 미리 고지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혹여나 그런 이유로 동아리를 나간다면 우리로선 고마운 거고.

- 네... 알겠어요, 언니. 수업 안 가세요?

신입생 명단을 들여다보며 못 들은 척했다. 잠시 내 답을 기다리던 후배는 동아리방을 나섰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폭력? 웃기고 있네. 우리의 메시지가 일부 격렬하게 읽힐 수도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집행부원이라는 작자가 시위에서 표출되는 메시지의 속뜻을 읽어낼 줄은 모르고, 단지 그 피상만을 보고서 폭력적이라고 언급하다니. 더군다나 우리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그동안 그런 태도로 대자보를 붙여대고 형식적으로 시위에 참여해 왔다는 건가? 지금 신입생들이 없기에 망정이지 폭력과 저항을 분간하지도 못하는 집행부원의 한심한 수준을 들킬 뻔했다.

슬그머니 올라오는 짜증을 억누르며 신입 부원들에게 가입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기분 전환 겸 이번 주 시위에 같이 참여할 동아리 목록을 살펴봤다. 교내뿐만 아니라 타 학교 동아리까지 참여 의사를 밝혀 규모가 꽤나 커질 듯했다. 어깨가 무거우면서도 든든했다. 앞으로 교내외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할 이들을 우리가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며 그 일에 우리 동아리가 앞장서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했다.

1교시 수업이 있지만 오늘도 결석해야 할 것 같다. 집회 물품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손질이 필요한 것들은 미리 분류를 해둬야 했는데 학기 초의 행사들과 일정이 겹쳐서 시작도 못한 상태였다. 혼자서 집회에 쓰일 팻말을 하나씩 살펴보다가 무심코 시계를 보니 벌써 9시가 넘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뜨끔하긴 했다. 요즘 들어서 학점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생각이 불현 듯 스쳤다. 평일엔 경찰서에 집회신고서를 제출한 다음, 집회 당일 사용할 플래카드와 팻말, 복장 등 갖가지 준비물도 집행부가 챙겨야 하며 거의 매일 교문 앞에 나가 집회 참여를 독려한다. 그리고 주말에는 직접 집회를 주도하거나 규모가 더 큰 집회에 합류하기도 한다. 일주일 내내 행사 준비하랴 거리에 나가랴 전공 공부할 시간 따위는 나질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아리에 할애하는 시간을 줄이고 싶지는 않다. 집회에 참여하면서 여성이기에 간직해야만 했던 마음 속 응어리를 뱉어낼 수 있었고 그때만큼은 예의 답답증도 얼씬할 수 없었다. 때로는 그것이 조금은 격렬하게 표출될 수도 있겠지만 나처럼 답답증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여성이 더 이상 나오지 않으려면 우리가 먼저 나서서 그들을 계도해야 했다. 비록 지금 대부분의 남성들이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못 들은 척 외면하고 있지만 멈춰서는 안 된다. 확실한 메시지를 남성들에게 각인시키고 그들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꿔야만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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