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의 어둠
마음속의 어둠
  • 전북대신문
  • 승인 2019.05.22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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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뇌관

상당히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오늘 집회에서 표출될 에너지가 벌써부터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본가에 가서 엄마를 만날 생각을 하니 설레는 기분까지 들었다. 동아리 일에 매진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과 여성학 공부에 대한 계획을 말씀드려야 했지만 우선 무거운 주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오빠는 역시나 먼저 출근한 듯 집이 또 적막했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시외버스를 탔다. 엄마에게 집에 간다고 문자를 해뒀지만 버스가 달리는 내내 답장이 없었다. 1시간 정도를 달려 터미널에서 내리니 엄마에게서 답장이 왔다.

‘딸~~ 되게 일찍 왔네? 엄마 지금 백화점. 너도 올래?’

아침부터 쇼핑하는 엄마도 참 대단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엄마 백화점이야?

- 어, 오전에 무슨 이벤트 있다고 해서. 너 집 앞에 백화점으로 나와라. 1층에서 기다릴게.

- 알았어요. 금방 갈게!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택시를 잡고 집 앞 백화점으로 향했다. 엄마는 나를 백화점 로비에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 아침 일찍 오느라 고생 많았지? 화장품만 조금 둘러보고 집 들어가자. 점심 식사 차려줄게.

방학 중에도 집을 찾아가지 못했던 것이 죄스럽게 여겨졌으나 괜히 미안해하면 엄마도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미안한 마음을 죽이려 능청을 떨었다.

- 좋아. 엄마, 근데 나도 사주는 거야?

- 그럼, 오랜만에 보는 딸인데 당연하지.

우리 모녀는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요즘의 근황들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빠와 화해를 아직 하지 않았다는 말에는 엄마도 언짢았는지 인상을 썼다. 그럼에도 하는 말이,

- 네가 이해해주렴. 기자 생활 하느라 스트레스 받는 일이 이만저만이겠니.

엄마는 나와 있을 때면 오빠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표정으로는 드러냈으나 정작 말과 행동은 표정과 딴판이었다. 오빠와 있을 때는 그저 상냥하기만 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으나 그것 또한 엄마의 교육법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빠마저 감화시키는 엄마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그런 식으로 발현되는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언가 콕 짚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엄마의 태도가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 내가 저번 주에 고등학교 동창회에 나갔는데 말이야. 친했던 친구들마다 자기네 딸들이 너무 변했다고, 사위 맞이하기는 글렀다고 하소연을 하더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불안했다. 엄마만큼은 제발..

- 딸들이 변했다니?

- 아니, 요즘 뉴스 보면 여대생들 모여서 시위하고 그러잖아. 저희들 딴에는 여권 신장이다 그러지만 적당히 해야지. 저희들 부모님 생각은 안 해? 앞으로 집안 살림도 해야 되고 자식들도 키워야 하는데. 그렇게 불평불만 많아서야 쓰겠냐구.

- 엄마, 여자가 꼭 결혼하고 집안일이나 육아를 전담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가슴이 철렁했다. 아까 엄마의 태도가 이상하게 받아들여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얘는. 또 철없는 소리 한다. 그럼 결혼 안 할 거야? 결혼 안 하고 여자가 혼자 어떻게 살아. 남편이 있어야지. 너 설마, 넌 아니지?

이제야 엄마의 표정을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엄마는 그동안 아빠와 오빠를, 아니 집안의 남성들을 모셔왔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아빠처럼 매를 들며 데시벨을 높이지는 않았으나 소위 ‘여성스럽지 못한 행동’에 대해서는 조곤조곤 혼을 내셨고 평소에도 그것을 강조해 왔었다. 머리가 커가면서 그저 부모 세대의 일반적인 통념일 뿐이라고 여겨왔으나 그것을 이 시점에서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 엄마에게라도 내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게 됐다.

- 엄마가 생각하는 여자로서의 삶은 대체 뭐야? 규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조선시대... 양반집 부인들처럼 사는 거?

답답증이 다시 일었다. 절망스러웠다.

- 에이, 요즘 시대에 무슨 소리니.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남편 뒷바라지 해주면서 가정 꾸리고 나중엔 자식들 바라보며 사는 거지. 명절 때 애들 데리고 한 번씩 찾아와주고.

말을 더 꺼낼 필요가 없었다. 쇼핑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집에 돌아왔다. 답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었다. 다행히도 아빠는 집에 있지 않았다. 엄마가 차려준 점심 식사를 건성건성 먹고 서둘러서 짐을 챙겼다.

- 딸, 벌써 가는 거야? 아까부터 안색이 왜 그러는 거야. 너 어디 아프니?

- 아니요. 시험공부 해야 돼서요.

미안한 마음보다는 빨리 집회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서둘러 학교로 돌아와서 동아리관으로 향했다. 답답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동아리방에 도착하니 이미 집행부원들과 신입생들이 모여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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