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주체적인 삶, 간호사 길로 인도했죠
어린 시절부터 주체적인 삶, 간호사 길로 인도했죠
  • 전북대신문
  • 승인 2019.05.2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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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형성에 기여한 윤행자 재독한인간호협회 회장]

어린 시절부터 주체적인 삶, 간호사 길로 인도했죠

 

간절함으로 파독, 가족과의 헤어짐 가장 힘들어

한국인과 맞지 않았던 독일 식사, 재치로 극복

해외 취업, “언어와 문화 사전 조사 필수” 조언

1950년대 전쟁을 겪은 한국은 그 상흔이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가난과 빈곤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타개책 중 하나로 한국은 광부와 간호사 파독을 결정했다. 환율 차이로 이들이 독일에서 받는 급여는 상당해 많은 수의 지원자가 몰렸다. 높은 경쟁을 뚫고 선발된 광부와 간호사는 독일에서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근무했으며 독일 정부는 그 점을 높이 사 한국정부에 차관을 결정했다. 한국 정부는 그를 종자돈 삼아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서서히 빈곤을 해결해 나갔다. 그 역사적 중심에서 독일 한인 간호사회를 조직하는 등 힘을 보탰던 윤행자(간호·59) 재독한인간호협회 회장을 만나봤다.

윤행자 회장은 우리학교 간호대학의 전신인 전주 간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머나먼 타지 독일에서 한평생 환자들을 간호했다. 이제는 한독 간호협회 고문으로 그 일을 이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12년 여수 엑스포 개최 당시 독일어번역 자원봉사 등을 통해 독일과 한국을 이어주는 다리로도 활약하고 있다. 한국 정부에선 그녀의 공로를 인정해 장관 표창과 대통령 표창을 시상했다.

윤 회장의 인생은 역사의 굵직한 흐름들과 함께 했다. 그녀는 국민 학교 입학 전 6.25 전쟁을 겪고 피난 중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가 형사로 근무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렇다 보니 윤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하는 습관이 들었다.

그녀는 중학교 2학년 때 결핵 발병으로 학교를 휴학하고 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상냥하게 보살펴주던 간호사들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결핵으로 반년을 휴학하고 학교에 돌아오니 유급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윤 회장은 유급 기간을 만회하기 위해 학교를 더 다니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입원을 통해 간호사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 윤행자 회장은 전주간호고등학교 진학을 고민, 전학을 통해 간호고등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윤 회장은 남원과 순창에서 간호교사로 근무했다. 그녀는 남편과 자신의 봉급으로는 가족들 생활과 두 아이의 장래가 보장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중 윤행자 회장은 파독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이것이 돌파구라 생각한 그녀는 파독 간호사가 되기 위한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수십 대 일의 필기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윤 회장은 그 누구보다 끈기 있게 밤을 지새우며 공부했다. 마침내 필기시험을 통과한 그녀는 면접을 보게 됐고 면접관 앞에서 윤 회장은 “죽을 각오로 공부했고 독일에 가서도 나라에 누를 끼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그렇게 면접에 통과한 날 그녀는 감정이 너무나 복받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독일로 가야할 날이 가까워 올수록 두고 갈 가족과 두 아이가 떠올라 하루하루 힘들었다. 그녀는 “이 아픔은 아직도 우리 파독 간호사들과 두고 온 아이들에게 평생 풀리지 않는 한이 됐습니다”라며 당시 심정을 전했다. 슬픔에 젖어있을 시간은 없었다. 독일에서 일을 해야 하는 그녀에게 언어라는 넘어야 할 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 회장은 “환자들을 이동 할 때나 식사를 할 때 단어를 외웠고 손짓 발짓을 이용해 독일어 회화를 늘려갔어요. 또 첫 월급의 절반이 넘는 가격의 녹음기를 사 쉬는 시간마다 독일어 테이프를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주위 동료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 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반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를 반복했다. 시간이 흘러 직장의 어려움이 줄고 점점 자신감이 생겼다. 윤 회장은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할 수 있다고 마음먹기, 긍정적인 생각, 진실함 이 세 가지만 기억하고 실행한다면 무엇이든지 헤쳐 나갈 수 있을것”이라고 조언했다.

독일 생활에서의 또 다른 어려움은 바로 음식이었다. 윤 회장은 “병원에서 제공해 주는 음식 대부분이 한국인과 맞지 않아 생활력과 일의 능률이 떨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매월 월급에서 식사 값이 공제되고 있었기에 문제를 꼭 해결해야 했다.

윤 회장은 어느 저녁식사에 병원 서무과장, 간호과장, 수간호사들을 초대하고 젓갈을 포함한 맵거나 새콤달콤한 한식 식사를 차렸다. 의도적으로 반찬들 사이에 아스파라거스 햄롤을 놓았다. 초대한 손님들은 한번씩 모든 반찬들을 먹어봤지만 이 반찬들이 독일인 입맛에 맞을 리가 없었다.

그가 예상한 대로 아스파라거스 햄롤이 담겨져 있던 접시만 비었다. 그녀는 능청스럽게 “햄롤 접시만 비었네요”라고 말하자 손님들은 “한국 음식은 맵고 짜서 먹기 힘드네요”라고 답했다. 그녀는 이때다 싶어 “우리 한국인들도 그래요. 평생 먹어 보지 못한 음식을 먹어야 해 무척 힘들어요. 늘 배가 고파 일의 능률도 떨어집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서무과장이 윤 회장의 의도를 깨닫고 “내일 당장 식단 문제를 해결합시다”라고 답했다.

윤 회장의 재치로 병원에 있던 한인 간호사들은 병원에 냈던 식비를 돌려 받았고 기숙사에서 직접 음식을 해먹을 수 있도록 부엌 기구와 식기, 식품 등을 제공 받을 수 있게 됐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병원에서 근무하던 35명의 한국인 간호사들은 입에 맞는 식사를 할 수 있게 됐다.

윤 회장은 간호사로 일하며 가장 큰 보람은 환자의 마지막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행자 회장은 “죽음 앞에서 예의를 지켜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환자를 깨끗이 씻겨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한 송이 꽃을 꽂아 보내드리는 것이 제가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에요”라고 말했다.

윤 회장은 해외에서의 생활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도 조언을 남겼다. “50여 년 전 파독 근로자들이 독일로 갈 때 독일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진출하고자 하는 나라에 대한 사전조사는 필수입니다”라며 또한 “해외에서 언어 공부는 회화에는 도움이 되지만 문법 같은 언어의 기초는 한국에서 공부해 가야합니다. 그 나라 신문이나 뉴스를 읽고 들으면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고 조언을 더했다.

윤 회장은 “70살이 훌쩍 넘은 현재 남은 생은 자식과 손자들 커가는 모습을 보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봉사하며 살고 싶어요”라며 “간호사로 환자들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어요”라고 말했다. 끝으로 “위기의 순간은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만 잘 극복하면 성공으로 가는 열쇠가 될 것”이라며 후배들을 응원했다.

장경식 기자

guri53942@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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