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5. 마음속의 어둠
[연재소설] 5. 마음속의 어둠
  • 전북대신문
  • 승인 2019.06.05 09:4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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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음속의 어둠

- 늦어서 미안.

- 아니에요. 언니가 미리 준비 해주셔서 저흰 집회만 나가면 될 것 같은데요?

아직 집회 시간까지 1시간가량 남았으나 견딜 수가 없었다.

- 우리 지금 나가면 안 될까? 다른 동아리들은 1시간 뒤에 합류하라고 하고.

- 네? 지금요?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봤다.

- 제발. 어려우면 나라도 지금 나갈게.

- 저희도 나갈게요. 얘들아 피켓이랑 팻말 하나씩 챙기고 플래카드는 2인 1조로 들어줘. 구호는 집행부가 선창하면 너희들이 복창하는 거야. 알겠지?

- 네!

교문 앞의 거리로 나가니 여러 사람들로 북적였다. 설치해 놓은 연단에 올라서서 확성기를 들었다. A4 용지에 빼곡히 적힌 문장들을 읽어 내려갔다. 답답증이 풀리기 시작했다. 살 것 같았다. 동아리 부원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잡고 앉아서 집행부원들의 유도에 따라 구호를 외쳤다.

- … 이 땅의 여성들이 언제까지 남성들에게 억압받으며 살아야 합니까! 우리 사회의 가부장제를 뿌리 뽑기 위해서 이젠 우리 여성들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박수를 받으며 연단에서 내려왔다. 이제 집행부원들과 신입생들의 연설문을 들을 차례였다. 교내외의 다른 동아리 부원들도 합류하기 시작했고 거리는 일반 시민들보다 집회 인원이 더 많아 보였다. 어제 오전, 동아리방에서 집회의 폭력성 운운하며 위선을 떨었던 후배가 연설을 하고 있다.

그 후배의 연설문 내용에 관계없이 구호를 외쳤다.

- 언제까지 밤길을 무서워해야 합니까! 남자들은 각성하라!

내 구호에 집회 참가자들이 복창하며 거리를 울렸다.

- 남자들은 각성하라!

어느새 의경이 진열을 갖추고 있었다. 내 구호는 더욱 격렬해졌고 시위대의 외침도 따라서 격렬해졌다.

- 범죄자들! 물러가라!

시위대의 커다란 함성이 모두 내 목청을 거쳐 나오는 것 듯했다. 오전부터 내 가슴을 막고 있던 답답증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더욱 강렬해진 시위대의 구호에 기름을 부었다. 모두 타올라라. 타올라서 우리를 억압하던 그 모든 것들을 태워버리고 싶었다. 거리의 남성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를 옥죄던 답답증은 이 땅의 남성들이 없어지지 않으면 해소되지 않을 것처럼 여겨졌다.

한창 집회에 열중하던 중, 언젠가부터 익숙한 체형의 남자가 카메라를 든 사람과 함께 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제, 오빠의 문자가 떠올랐다. 집회 현장을 취재하러 오빠가 온 게 틀림없었다. 인터뷰를 요청하려고 기다리는 건가. 기꺼이 응해서 내가 옳다는 것을 각인시켜 줘야겠다. 확성기를 들고서 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 오빠!

크게 소리를 질렀지만 듣지 못했는지 오빠는 그대로 서있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보니 오빠가 굳어진, 빳빳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가 검정색 목검을 들기 직전, 그 얼굴 그대로였다. 왜 나를 보고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기분이 이상해지고 어느새 흥분은 가라앉았다. 오빠는 다가가고 있는 나를 멀리하며 카메라맨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도망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 만큼, 오빠는 의경 진열 쪽으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그런데 그 진열에서 누군가 오빠의, 아니 아빠의 검정색 목검을 들고 있었다. 우리 집에 있어야 할 목검이 왜 저기에... 이질적이었다. 눈을 비비고서 다시 쳐다보니 경찰 진압봉이었다. 갑자기 시위대의 함성과 구호가 내 고막을 찔렀다. 평소 집회에서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른, 어디선가 들어본 것만 같은 데시벨 크기였다. 익숙해마지 않았던 지금의 아우성이 오빠와 목검을 두고 싸우던 그날의 호통 소리로 변환되어 내 가슴을 관통했다. 가슴이 다시 답답해지고 현기증이 났다. 내가 지금까지 무엇과 싸워왔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정신을 다잡고 답답함을 몰아내기 위해 확성기를 입에 갖다 댔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 순간, 내 마음을 뒤덮고 있는 어둠이 느껴졌다. 십여 년 간 나를 옥죄었던 답답증은 이것의 중량 때문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오빠도 나와 꼭 같은 밀도의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그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을 수 있었다. 빛줄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확성기를 내려놓고 시위대를 빠져나와 오빠가 사라진 쪽을 향해 달려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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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19-06-13 17:19:37
다음 거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