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진 로맨스
제라진 로맨스
  • 전북대신문
  • 승인 2019.09.06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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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진 로맨스

(제라진 : ‘제대로 된’의 제주 방언)

정주리 국어국문 12

1장 연애의 끝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여기저기서 철컥,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비행기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된다’는 승무원들의 목소리가 황급히 소란해진 기내의 공기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벨트에 가져가던 손을 도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때 마침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혼란을 집어삼켰다. 너도 나도 일어나 복도를 가득 채운 것도 모자라 그 좁은 틈새로 기내 반입용 캐리어를 꺼내던 몇몇의 사람들이 흠칫 놀라 행동을 멈추었다. 태초에 가까운 소리가 모두의 뇌리에 각인되는 듯했다. 그것도 잠시, 사람들은 마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조금이라도 빠르게 육지에 발을 딛고자 밀고 소리 지르고 인상을 썼다. 그녀는 인상을 쓰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여전히 아기는 울고 있었고, 어르고 달래는 부모의 음성에도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끄러워."

무의식중에 새어나온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 남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고작해야 3초였지만 그녀는 그의 눈에 서린 분명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증오’. 그때 영원히 멈춰있을 듯하던 줄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녀의 앞에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중년의 남성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불쾌한 감정을 담아 그의 뒤통수를 한껏 째려보았지만 그는 더 이상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예민하게 받아들인 건 아닐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그렇게 싫어할 수 있나? 그녀는 찝찝했다. 다행히 수하물을 기다리는 트레일러에서는 그를 마주치지 않았고, 그녀는 곧 그를 잊어버렸다.

[보고 싶어.]

"응, 나도."

게스트 하우스의 공용 공간에 놓인 빈백에 길게 드러누운 그녀가 발가락을 기분 좋게 꼼지락대며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피곤해?]

"응? 조금. 괜찮은데, 왜?"

[그냥. 목소리에 힘이 없어서.]

그녀는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그가 자신의 기분을 잘 알아채서 좋았는데, 7년이 지난 지금은 그 점이 가장 불편했다. 사실 급작스러운 제주도 행은 그를 피하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일찍 자랬잖아. 잠을 설치니까 벌써 피곤하지. 오늘은 일찍 자. 그래야 내일 시간을 알차게 쓸 수 있지.]

"아… 응. 자야겠다."

[잘 자.]

그녀는 그와의 통화를 끝낸 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기지개를 켰다. 경험치가 야박한 필수 퀘스트를 깬 느낌이랄까. 기나긴 연애가 끝나간다는 것을 그녀는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몇 년 전에 냉담해진 그를 보며 셀 수도 없는 밤을 울고불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변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그녀의 관계는, 그녀가 온 힘으로 끌고 가야만 힘들게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7년 전부터 흔들리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변하지 않을 관계를 놓치지 못해서, 그 알량한 상실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제 기분은 안중에도 없는 스스로에게 실망감이 들었다. 이 멀리까지 도망치듯 떠나왔어도 여전한 사실이었다. 문득, 비행기에서 마주친 남자가 떠올랐다. 실로 오랜만에 타인에게서 날것 그대로의 시선을 받은 것이라 그런 걸까. 그녀는 충동적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안 잤어? 자라니까, 얼른.]

"우리 요즘 이상하지 않아?"

[……]

"헤어지자고 할 건데, 나 잡을래?"

[글쎄.]

"그래. 그동안 애썼어. 고마웠고. 근데, 나중에 애인 생기면 또 그렇게 주눅 들게 하고 가르치려고 들지는 마. 치졸하게 전화로 헤어지자고 해서 미안."

[그래. 고마웠어.]

통화가 종료되는 소리가 들렸다. 7년 동안 그가 먼저 전화를 끊는 건 처음이었다. 정말, 이렇게 끝인 걸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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