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진 로맨스
제라진 로맨스
  • 전북대신문
  • 승인 2019.09.1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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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라진 로맨스

2화. MAYBE

장장 7년이나 끌어온 연애가 끝이 났어도 여전히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머리카락을 속속들이 훑고 가는 곳마다 사람은 많다. 내가 한껏 청승을 떨 수 있게 한적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괜히 마음이 뾰족해졌다. 몇 년 전에는 그와 함께 걷던 길인데. 여기가 바로 어릴 때 미술 교과서에서나 본, 뼈가 앙상한 소를 그린 화가 이중섭의 길이란다. 생각보다 길은 짧았고, 볼 거리가 많지도 않았다. 그의 입에서 어려운 단어들을 고르고 골라 나열되는 이중섭의 삶이란 나를 아주, 지루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매섭게 들이닥쳤던 권태기가 막 지나가는 와중이었기 때문에 눈을 크게 뜨고 토크쇼 패널처럼 반응하긴 했으나, 그다지 귀기울여 듣지는 않았다. 물론 그 또한 내가 그의 말을 다 이해할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겠지만.

여행객이 붐비는 제주도는 퍽 슬펐다. 그가 툭하면 읊조리던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행복해 할수록 나의 외로움은 커지기만 했다. 내가 혼자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면 그에 비례하는 크기로 서글퍼졌다. 경사가 꽤 급하게 난 길을 따라 걷다가 큰 유리창을 달아 놓은 카페로 들어갔다. 사람이 뜸한 골목에 태평하게 누운 강아지들을 더 들여다보고 사진도 찍고 싶었지만 햇살이 따가웠다. 8월의 절반이 지나갔으니 더위가 한풀 꺾일 법도 한데, 도통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환영의 인사를 그닥 반갑지 않은 말투로 읊조리는 직원에게 어색한 눈인사를 하고 안쪽 자리를 골라 앉았다. 아직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낯설어서 어디를 가든 구석에 숨게 되었다.

"아이스 아메… 아니, 아이스 바닐라라떼 하나 주세요."

조그마한 뿌듯함. 그는 늘 내 몸매를 관리해준다는 미명 하에 카페에서 주문하는 것까지 간섭하곤 했다. 다시 자리에 앉아 복사뼈 께를 긁었다. 조그맣게 부푼 것이 아무래도 그 사이 모기에 물린 모양이었다. 그가 늘 약을 챙겨 다니면서 잔소리를 더해 발라주곤 했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눈 앞에 커피가 담긴 유리잔이 퉁명스레 놓였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여전히 직원은 불친절했지만 내심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 덕분에 붙들려 있던 그의 망령이 걷힌 것 같았다. 바닐라 라떼를 한 모금 먹고 나니 이상하게 코끝이 찡했다. 안 하던 짓을 해서 그런가? 바닐라 라떼가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주변을 의식할 새도 없이 나는 유치원에 다닐 때나 하던 짓을 했다. 엉엉, 소리를 내어 운 것이다.

갑자기 손님이 운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이지? 차분하게 돌이켜 본다. 나는 그저, 시킨 메뉴를 메뉴얼대로 만들어서 가져다 주었을 뿐이다. 생각보다 라떼가 맛이 없었을까? 내가 친절하지 않아서? 아니다, 그녀에게는 무언가 개인적인 사정이 있을 것이다. 저 여자도 애인이랑 헤어졌을까?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깨를 움찔하는 것을 보니 내가 인상을 꽤나 사납게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사과를 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다. 그래도 놀람의 여파인지 거세게 흔들리던 어깨가 잦아들었다. 이상하게 낯이 익은 얼굴이다. 문득 모든 것이 지겨워져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런들 저런들 무슨 상관인가. 바로 어제, 애인이랑 헤어져 버렸는데. 몇 없는 손님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나가 버렸다.

"또 오세요."

내 입에서 나간 말이지만 아주 퉁명스럽다. 다정한 인사말이건만 말투도 표정도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손님들도 다 알 것이다. 사장님이 알면 또 등짝을 야무지게 후려치며 잔소리를 늘어놓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해해 주겠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으니까. 나는 지금 내가 왜 차여야만 했는지를 추리하는 것만 해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죄송해요."

아직 축축한 뺨을 손으로 문질러대며 여자가 말을 걸었다. 아직 울음이 다 멎지 않았는지 코를 먹는 듯한 희한한 소리도 내면서. 아마 손님을 내쫓아서 죄송하다는 뜻이겠지? 난 정말 상관이 없는데. (내가 사장도 아니고) 대충 목례를 하고 냅킨을 두둑하게 집어서 그녀에게 가져다 주고 다시 바 안으로 돌아왔다. 괜히 조금이라도 옆에 머물렀다가 구태의연한 한탄을 듣게 될 것 같아서였다. 슬그머니 곁눈질을 했다. 막무가내로 눈물을 훔치다가 죄다 축축해져 물기가 선연한 손바닥 곳곳을 냅킨으로 대강 문질러 닦던 그녀가 또다시 으앙, 곡소리를 했다.

"시끄러워."

나도 모르게 나온 혼잣말에 스스로도 놀라 커다래진 눈을 하는 와중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너! 비행기!"

그제야 기억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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