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배운 인간존중…우리나라 최초 인권보고서 발간
학창시절 배운 인간존중…우리나라 최초 인권보고서 발간
  • 전북대신문
  • 승인 2019.09.1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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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소중함 알리기 위해 노력한 강철선 변호사

학창시절 배운 인간존중…우리나라 최초 인권보고서 발간

 

인권 가치 낮게 평가하는 사회 분위기 바꾸고파

강단 있는 검사 생활 후 인권 변호사로 활동

정치에 몸담으며 240여건의 법안 발의하기도

익숙해져서 그것의 소중함을 잊는 경우가 많다. ‘인권’도 그렇다. 강철선 변호사는 인권의 가치가 낮게 평가되는 사회를 바꾸고 싶었다. 그는 인권을 재조명하고 어려운 이들을 변론하는 일에 삶의 대부분을 바쳤다.

강철선(법학·54) 변호사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 조금 달랐다. 대부분 일반 학교 진학을 목표로 공부한 동기들과 달리 군산에서 혼자 사범학교에 입학해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당시 사범학교 선생이 정인보 학자의 말을 인용한 순간은 옛일임에도 생생하다. 사람 인 한자를 가로로 연달아 다섯 번 쓰고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운 사람만이 사람이다’는 강의를 했다. 공부를 잘했던 그에게 아버지 지인은 법학을 추천했다. 강 변호사는 법학을 배워 마침내 1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독재정권 시절이라 분위기가 험했다. 광주에서의 사법연수는 삭발을 한 채 진행됐다. 그 상태로 군사학, 전술학 등을 한 달 간 배웠다. 그나마 교육 수료 증명을 위해 치렀던 졸업시험은 통쾌한 추억이다. 시험을 보던 동료가 배탈로 화장실을 갈 상황이라 하니 시험 감독관이었던 대위가 말을 함부로 뱉어냈다. 말을 듣고 화가 난 강 변호사와 동료들은 시험지에 학번과 이름을 쓴 채 백지를 냈다.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군법 위반을 이유로 3년이 구형됐으나 항소해 2년으로 감형됐다. 이 후 다행히 군법이 바뀌었고 1년간 옥에 있다 사면됐다. 사면으로 이전 자격이 살아나 법조인을 할 수 있었다.

그는 18년 간 검사로 활동했다. 그 때 큰 성과를 올린 사건은 빙초산 남용 업체를 기소한 일이었다. 식품규정이 허술했던 당시 식품업계에서는 화학약품에 속하는 빙초산 사용을 남발했다. 고농도의 빙초산은식도와 위 점막에 접촉해 소화기계 손상 위험이 있었다. 강 변호사는 업체관계자 20~30명을 구속해 사회에 경각심을 줬다.

잘못된 일이라면 꿋꿋하게 자신의 생각을 관철해나갔다. 동두천 미군부대에서 장사하며 관세를 붙이지 않거나 양주 등을 정가보다 비싸게 팔아 부당하게 돈을 번 사업자가 있었다. 당시 검찰총장과 검사장이 수사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검찰 선배들과 미군부대 장사꾼이 친했기 때문이었다. 강 동문의 주변 사람들은 승진을 걱정하며 회유했다. 참지 못한 그는 검찰총장실 데모를 고민 중이었다. 이를 눈치 챈 검사장이 수사를 허락해 장사꾼을 구속한 일도 있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 때는 검사들 사이 사표 바람이 불었다. 전주지검부장으로 있던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군부세력 의사에 반하면 옥살이가 눈에 훤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1981년 변호사 사무실 개업, 대한변호사협회 인권변호사로 활약했다. 변정수 변호사,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일하며 김근태 고문치사사건 및 국가권력으로 인한 고문 등 인권탄압을 당한 이들을 위해 변호했다.

인권문제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변협의 인권 활동을 엮어 인권보고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보고서는 1985년 그렇게 탄생됐다. 그는 “그때만 해도 인권이란 문제가 크게 대두되지 않았다”며 “국가권력으로 인해 피해 받은 이들을 돕고자 했다”고 전했다. 이 후 인권위원회 동료들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고 故김대중 대통령 가택연금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등 사회참여적인 활동을 펼쳐나갔다.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도 그를 찾기 시작했다. 잔디밭에서 담배를 피우다 불이 나 호텔 잔디가 조금 탄 사건이 있었다. 호텔은 이를 산림법위반으로 고발한 상황이었다. 일반 방화였지만 산림법 위반으로 접수 돼 꼼짝없이 징역 또는 벌금형이 예견됐다. 우연히도 담배를 태우던 이는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이었고 강 변호사는 그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죄를 입증하려 애썼고 마침내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또 남대문시장에서 옷을 만들던 사람이 폭력배에 얻어맞고 폭행 혐의로 수사 받을 위기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딱한 사정을 들은 강 변호사가 도와 그는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생하던 이들을 위해 변호하던 강 변호사에게 국회의원 출마 권유가 쏟아졌다. 1992년 선거에 당선된 그는 재임시절 총 240여건의 법안을 발의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 특별위원회 구성, 5.18 광주의거 특별위원회 구성, 삼청교육피해자의 보상 등에 관한 특별법안 등 발의에 힘썼다. 민주당 전북옥구지구 당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는 쉽지 않았다. 사람 됨됨이나 성실성보다는 돈에 의해 좌우되는 일이 많았다. 주변 사람들의 배신에 마음 아픈 날이 늘었고 팔방미인을 요구하는 정치계와 스스로가 맞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치계를 떠난 그는 법무법인 정일의 대표변호사로 활동하며 퇴임까지 변호 활동을 했다. 그는 “어렸을 적 배운 인간존중이 법조계 및 정치 생활을 할 때 큰 도움이 됐다”며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강 변호사. 그의 삶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구현’이라는 민주적 기본질서를 다시금 새겨본다.

유경희 객원기자(ace@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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