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진 로맨스 3. 올레 시장
제라진 로맨스 3. 올레 시장
  • 전북대신문
  • 승인 2019.09.26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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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진 로맨스 3. 올레 시장

그와 그녀는 회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한 시간째 말 한 마디 없이 앉아 있다 가끔씩 소주만 들이키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하늘색 라벨의 한라산이, 그녀의 앞에는 짙은 파란색 라벨의 한라산이 각각 한 병씩 반절 정도 비워져 있었다.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종업원조차 그들의 테이블을 스쳐지나갈 때면 꼭 한 번씩 그들을 번갈아 보고 갈 정도로 둘은 별난 모양새였다.

"애인이랑 헤어졌죠?"

"뻔한 걸 짜증나게 왜 물어요?"

"나도요. 어제 헤어졌어요."

그가 한 시간만에 꺼낸 말은 지나치게 요점만 담고 있었다. 그녀는 부아가 치밀어 톡 쏘는 말투로 응수했으나 차분하게 동조하는 상대방 때문에 머쓱해지고 말았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그녀는 그를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어 팔짱을 끼고 방어 태세를 취했다.

"비행기에서 째려본 건 미안해요. 변명같은 건 하지 않을게요. 안 그래도 마음에 걸렸어요."

그녀의 경계심을 눈치챈 그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을 덧붙였다.

"내 마음 편하자고 사과하는 거 아니에요! 정말로. 안 받아주셔도 돼요."

"참 나."

그녀는 짧게 혀를 찼지만, 이미 눈매가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둘은 마주 앉은지 한 시간 하고도 이십 분 만에 처음으로 소주잔을 부딪치며 '짠'을 했다. 열 번이 넘어가 더 이상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짠'을 했을 때, 그들의 테이블에 뜬금없이 물회가 한 접시 놓였다.

"둘이 드디어 화해했어? 먹으면서 싸워."

연신 그 둘을 곁눈질하던 종업원의 짓궂은 농담에 그는 뒷목을 벅벅 긁었다.

"이모, 싸운 거 아니예요. 오늘 처음 보는 분인데."

"아, 그래? 그렇게 자랑하던 여자친구인 줄 알았지."

"헤어졌어요."

"또? 으휴, 너네는 지치지도 않니. 좋을 때다."

곧 '이모'의 눈은 '이러는 걸 네 여자친구는 아냐'는 의미를 담고 그와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마치 변명하는 것처럼 한숨을 섞어 주절거렸다.

"이번엔 진짜예요. 안 그래도 심란한데 자꾸 그렇게 놀리실 거면 물회 안 먹을래요."

"알았어, 알았어. 얘기들 해요~"

투정부리듯 입술을 쭉 내민 그의 표정을 보고 너털웃음을 지은 종업원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는 그제야 마음놓고 웃을 수 있었다.

"원래 그렇게 앙탈이 많은 편이예요? 대박 안 어울려."

"참 나. 이건 그냥 붙임성이 좋은 거죠. 애교라고 해주실래요?"

"근데, 이름 뭐예요? 우리 이름도 모르고 여태 술을 먹었네."

"임구름이요."

"저는 한바다예요."

바다는 새삼스러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구름과 바다라니. 그와 나는 운명이 아닐까? 그녀는 괜히 술을 들이켰다. 왜 짠을 하지도 않고 먼저 마셨냐는 구름의 말은 가뿐히 무시하고. 통성명을 하고 나자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레 깊어졌다. 바다는 국문학을 전공했고, 구름은 대학을 가지는 않았지만 배우가 꿈이라고 했다. 구름은 바다에게 꿈을 물었고, 바다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바다는 시를 좋아한다며 백석을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았고, 구름은 시가 어려워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구름은 말이 많은 만큼 호기심도 많아서 바다에게 시를 직접 쓰지는 않냐고 물었지만 바다는 말을 돌렸다. 다행히 두 사람은 공통점도 있어서 최근에 개봉한 영화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나누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 사람과는 반대의 평가를 내린 영화여서 특히나 더 반가웠다) 두 사람 모두 영화관에서는 커피 하나만 들고 보는 것을 좋아하며, 무서운 영화는 보지 않았다. 바다는 웬만하면 겁을 내지 않아서였고, 구름은 툭하면 소스라치게 놀라서였지만. 두 사람은 미술관을 좋아했고, 혼자 가서 오랫동안 들여다 보는 것을 좋아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다음 날의 스케줄을 물었다. 누구 하나 용기내지 못하는 사이, 술이 비워지는 것보다 회가 비워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두 사람은 해물 뚝배기를 추가로 주문했고, 주량 근처에도 미치지 않는 술을 마셨지만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된장을 베이스로 육수를 낸 국물을 떠 먹으면서 두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진득한 감탄사를 했다. 이내 바다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질문을 하고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해장도 했으니까, 우리 내일 보는 거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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