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진 로맨스
제라진 로맨스
  • 전북대신문
  • 승인 2019.10.02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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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진 로맨스

 

4화. 빛의 벙커

 

바다는 제대로 눌린 뒷머리를 정돈할 새도 없이 반 밖에 뜨지 못한 눈으로 거울 앞에 서서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거울을 마주하고 배시시 웃었다. 거의 감긴 눈에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모양새가 제 눈에도 우스워서 그녀는 소리 내어 한 번 더 웃었다. 핸드폰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고, 침대에서 일어나 침구를 정돈하는 일련의 동작들이 가뿐했다. 실없는 웃음이 절로 나는 아침이라는 것이, 아주 오랜 만이었다.

[일어났어요?]

때마침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한 바다가 다시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낸 뒤, 입 안을 마저 갈무리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구름과 함께 있는 시간은 편안하고 느릿했다. 무엇 하나 서두를 것이 없는 기분이랄까. '그'와 함께할 때는 늘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설렘과 맞닿은 감정이라고 스스로를 달래곤 했다. 동시에 똑똑하고 괜찮은 사람을 곁에 두었으니 나 또한 꽤 봐줄 만 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했다. 홀로 서지는 못하는 자신감이었다.

이쯤에서 바다는 생각의 스위치를 끄는 법을 알지 못하여 자주 과거를 되새기는 자신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 머리를 감기로 했다. (허리를 가뿐히 넘기는 긴 머리는 한 번 감기도 여간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녀가 머무는 게스트 하우스는 보일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대부분 벼락같은 냉수가 내리쳤다. 바다는 아직 단잠에 빠져 있는 타인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비명을 삼키며 신속한 손놀림으로 머리를 감았다. 효과가 좋았다.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비가 온대요. 혹시 모르니까 우산을 챙기는 게 좋겠네요.]

구름은 새벽같이 눈을 뜬 자신이 우스워 푸흐흐, 웃고 말았다. 풍선에서 바람이 새는 것처럼 실없는 소리가 났다. 무관심을 수시로 휘두르던 과거의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문득 ‘그녀’가 떠올라 구름은 저도 모르게 근심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무언가를 진득하게 하는 법이 없었고 그것은 연애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와도 줄곧 다투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다. 그나마 연애가 지속된 것도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게하에 온수가 잘 안 나와요ㅠㅠ 머리 얼 뻔]

[감기 걸리는 것 아니에요?]

[저 건강 빼면 시체예요ㅋㅋ 좀 이따 봐요!]

무표정하게 나열된 글자에서 그녀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아 구름은 또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문득문득 끼어드는 무거운 생각을 내려두기로 했다. 그는 그녀가 좋았다. 함께 있으면 편안했고, 바다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니겠는가.

 

구름과 바다는 이른 아침에 만나 눈에 띄는 분식집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고 버스를 탔다. 버스를 두 번 환승해야 했고, 장장 두 시간이 걸렸으며, 버스 정류장에서도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아침부터 수상했던 하늘은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엄청난 비를 쏟아냈다. 바다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비가 온다며 한탄했고, 구름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그녀를 놀려댔다. 바다는 잘 따라주지 않는 날씨 탓에 심통이 났지만 이내 약을 올리는 구름에게 응수하느라 금세 날씨에 대한 것은 잊어버렸다. 두 사람은 지치지도 않고 내내 이야기를 이어갔다. 주로 시답지 않은 장난이었다. 그럼에도 둘은 무척 즐거웠다.

비는 많이 오고, 길은 울퉁불퉁하고, 그 와중에도 차가 계속 다니기 때문에 걸어서는 들어갈 수 없다는 안내 요원의 말에 두 사람은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가 셔틀버스를 탔다. 외출을 한 지 서너 시간 만에 겨우, 전시관에 입장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다 평소에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던 작가의 작품인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빠져 들었다. 횟집에서의 (제대로 된) 대면 이후 처음으로 두 사람 사이에 적요가 끼어들었다. 편안한 고요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수다를 떨며 두 사람을 스쳐 갔다. 구름과 바다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아 한참 동안 맞은편을 응시했다. 벽을 가득 채운 대담하고 화려한 색채가 그들의 눈을, 오롯이 이 작품을 위해서 만들어진 음악이 그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바다는 문득 군중 속의 고독이 이런 것이라면 꽤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손을 찾았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고 내내 잡고 있다가 출구에서 대기할 때쯤 머쓱하게 놓았다. 여전히 구름과 바다는 말이 없었다. 굳이 침묵을 깨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함께 느낀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단어를 속으로 고르고 고르는 중이기도 했다.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비가 그쳐서 두 사람은 각자 바깥쪽 손에 우산을 쥐고 안쪽 손을 서로 맞잡은 상태로 천천히 걸어갔다. 문득 바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저, 내일이면 떠나요.”

4화. 빛의 벙커

바다는 제대로 눌린 뒷머리를 정돈할 새도 없이 반 밖에 뜨지 못한 눈으로 거울 앞에 서서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거울을 마주하고 배시시 웃었다. 거의 감긴 눈에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모양새가 제 눈에도 우스워서 그녀는 소리 내어 한 번 더 웃었다. 핸드폰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고, 침대에서 일어나 침구를 정돈하는 일련의 동작들이 가뿐했다. 실없는 웃음이 절로 나는 아침이라는 것이, 아주 오랜 만이었다.

[일어났어요?]

때마침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한 바다가 다시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낸 뒤, 입 안을 마저 갈무리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구름과 함께 있는 시간은 편안하고 느릿했다. 무엇 하나 서두를 것이 없는 기분이랄까. '그'와 함께할 때는 늘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설렘과 맞닿은 감정이라고 스스로를 달래곤 했다. 동시에 똑똑하고 괜찮은 사람을 곁에 두었으니 나 또한 꽤 봐줄 만 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했다. 홀로 서지는 못하는 자신감이었다.

이쯤에서 바다는 생각의 스위치를 끄는 법을 알지 못하여 자주 과거를 되새기는 자신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 머리를 감기로 했다. (허리를 가뿐히 넘기는 긴 머리는 한 번 감기도 여간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녀가 머무는 게스트 하우스는 보일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대부분 벼락같은 냉수가 내리쳤다. 바다는 아직 단잠에 빠져 있는 타인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비명을 삼키며 신속한 손놀림으로 머리를 감았다. 효과가 좋았다.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비가 온대요. 혹시 모르니까 우산을 챙기는 게 좋겠네요.]

구름은 새벽같이 눈을 뜬 자신이 우스워 푸흐흐, 웃고 말았다. 풍선에서 바람이 새는 것처럼 실없는 소리가 났다. 무관심을 수시로 휘두르던 과거의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문득 ‘그녀’가 떠올라 구름은 저도 모르게 근심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무언가를 진득하게 하는 법이 없었고 그것은 연애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와도 줄곧 다투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다. 그나마 연애가 지속된 것도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게하에 온수가 잘 안 나와요ㅠㅠ 머리 얼 뻔]

[감기 걸리는 것 아니에요?]

[저 건강 빼면 시체예요ㅋㅋ 좀 이따 봐요!]

무표정하게 나열된 글자에서 그녀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아 구름은 또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문득문득 끼어드는 무거운 생각을 내려두기로 했다. 그는 그녀가 좋았다. 함께 있으면 편안했고, 바다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니겠는가.

구름과 바다는 이른 아침에 만나 눈에 띄는 분식집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고 버스를 탔다. 버스를 두 번 환승해야 했고, 장장 두 시간이 걸렸으며, 버스 정류장에서도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아침부터 수상했던 하늘은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엄청난 비를 쏟아냈다. 바다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비가 온다며 한탄했고, 구름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그녀를 놀려댔다. 바다는 잘 따라주지 않는 날씨 탓에 심통이 났지만 이내 약을 올리는 구름에게 응수하느라 금세 날씨에 대한 것은 잊어버렸다. 두 사람은 지치지도 않고 내내 이야기를 이어갔다. 주로 시답지 않은 장난이었다. 그럼에도 둘은 무척 즐거웠다.

비는 많이 오고, 길은 울퉁불퉁하고, 그 와중에도 차가 계속 다니기 때문에 걸어서는 들어갈 수 없다는 안내 요원의 말에 두 사람은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가 셔틀버스를 탔다. 외출을 한 지 서너 시간 만에 겨우, 전시관에 입장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다 평소에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던 작가의 작품인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빠져 들었다. 횟집에서의 (제대로 된) 대면 이후 처음으로 두 사람 사이에 적요가 끼어들었다. 편안한 고요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수다를 떨며 두 사람을 스쳐 갔다. 구름과 바다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아 한참 동안 맞은편을 응시했다. 벽을 가득 채운 대담하고 화려한 색채가 그들의 눈을, 오롯이 이 작품을 위해서 만들어진 음악이 그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바다는 문득 군중 속의 고독이 이런 것이라면 꽤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손을 찾았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고 내내 잡고 있다가 출구에서 대기할 때쯤 머쓱하게 놓았다. 여전히 구름과 바다는 말이 없었다. 굳이 침묵을 깨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함께 느낀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단어를 속으로 고르고 고르는 중이기도 했다.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비가 그쳐서 두 사람은 각자 바깥쪽 손에 우산을 쥐고 안쪽 손을 서로 맞잡은 상태로 천천히 걸어갔다. 문득 바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저, 내일이면 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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