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신문기자들이 말하는 그때 그 시절
대학신문기자들이 말하는 그때 그 시절
  • 전북대신문
  • 승인 2019.10.02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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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신문기자들이 말하는 그때 그 시절

전북대신문의 도전과 변화, 일상과 현장으로 더 깊이

 

 

1980년대∥민주화 열망과 편집 자율권 투쟁 활활

오랜만에 ‘전북대신문’ 축쇄본을 들여다본다. 30∼40년 전 선배들과 동기들, 그리고 후배들이 땀 흘려 썼던 기사들이 다시 활자(活字)가 되어 살아 숨 쉰다.

1980년대는 암울한 격랑의 시대였다. 1980년 봄 군홧발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정권은 유신시대 못지않은 독재 정치를 했다. 대학가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거의 날마다 계속됐다.

당시 대학신문은 ‘대항언론’의 역할을 다했다. 장명수 전 총장은 1995년 “전북대신문은 정치와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진정 올바름이 거짓에, 정의가 불의에 왜곡되어 지는 과거 암울한 80년대에 기성 언론이 다하지 못했던 목소리를 담아냈다”고 회고했다.

그때 학생기자들은 ‘편집 자율권을 위한 투쟁’을 쉬지 않았다.

활화산은 1980년 5월이었다. 그해 전국에서 민주화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 강현구 편집장 등 기자들은 ‘언론 검열 중지’를 외치며 나섰다. 기자들은 학생회장 연행 사건 등을 담은 648호(호외)를 제작했으나, 검열관에 의해 전면 삭제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에 인쇄소에 찾아가 초고판 10여장을 빼내어 보도사진 원판과 함께 각 건물 벽에 게시했다. 신문쟁이의 사명을 다하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픔이 컸다. 석 달 뒤 대학신문사와 대학방송국의 전 기자와 국원이 해임됐다. 116일간의 휴교 끝에 대학 문이 다시 열렸지만 2학년 기자들만 복직된 상태에서 648호(10월3일) 신문이 다시 나왔다.

내가 활동했던 1985∼86년도 마찬가지였다. 793호(1986년 5월12일)에서는 대학생들의 전방 입소훈련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특집부 기사로 인해 학교 당국과 갈등이 생겼다. 학교측은 ‘미제국주의의 용병교육’이라는 단어를 문제 삼아 몰래 윤전기 앞에서 ‘용병’이라는 단어를 깎아낸 채 인쇄했다. 신문이 나온 뒤에야 이를 확인한 우리들은 대자보와 현수막을 학내에 붙이고 강력 항의했다. 몇 년 뒤 대학가에서 이 훈련은 사라졌다.

851호(1989년 6월12일)에는 또 한 번의 진통이 담겨 있다. 이 신문은 5면의 기고문 하나가 송두리째 없어진 채 제작됐다. 그해 7월 북한에서 열릴 예정이던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대해 학생이 쓴 글을 문제 삼아 공안 합수부가 인쇄소에서 신문을 모두 압수해 갔다. 이에 기자들은 기사가 사라진 자리를 여백으로 두고 안내문을 실었다. 역사의 증거물로 남기기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민주화 투쟁만 담은 게 아니다. 전북대신문은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적절히 조화시키며 대학문화를 선도했다.

특히 1982년 3월부터 10년간 펼친 ‘향토 발굴 시리즈’는 다른 매체와 변별해 주는 한편의 대하드라마였다.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를 시작으로 ‘민간신앙의 맥을 찾아서’ ‘판따라 소리따라’ ‘가람에 스민 숨결따라’ ‘문학으로 비춰본 이 땅의 역사’ ‘역풍의 세월 되살아오는 사람들’ ‘산따라 맥따라’ 등의 기획물이 학생기자들의 릴레이 취재로 1992년 2월까지 이어졌다. 대학신문의 실험정신에 입각한 이 시리즈는 일간지에서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과감하고도 방대한 기획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화두도 꾸준히 제기했다. ‘혁명성, 그 요원의 불길’ ‘동학혁명과 방향 재조명 시급하다’ ‘농민 봉기와 그 문학의 반영’ ‘전봉준 연구’ ‘갑오동학제를 되돌아본다’ 등의 논단과 취재를 통해 일간지에서도 쉽게 다루지 않던 주제를 계속 곧추 세웠다.

25기 동기인 박규만 기자는 1986년 80만평에 이르는 학교 부지가 날로 줄어드는 실태를 고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박 기자는 ‘캠퍼스는 넓어가고 땅은 좁아만 간다’(798호) ‘침식당한 캠퍼스는 어디로’(800호)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통해 학교 당국과 전주시의 ‘토지 교환’의 문제점을 집중 보도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당대 우리 신문은 베스트셀러였다. 매주 월요일 정문과 후문 등에 쌓아둔 1만 5000여부의 신문은 점심시간 전에 모두 동이 났다.

872호(1990년 9월3일)는 제11대 김수곤 총장의 취임을 알린다. 김 총장은 전북대 첫 직선 총장이다. 교수와 학생들이 투쟁한 끝에 정부에서 임명하던 이른바 ‘어용총장’의 시대를 종식시켰다는 상징이 컸다. 이로써 전북대는 학원 민주화의 초석을 다지며 다시 큰 걸음을 내딛게 됐다.

김용권(국민일보 기자 / 중어중문 84)


1990년대∥이세종, 최명희 작가 그리고 북한민주화 논란

어느 덧 개교 72주년을 맞이한 전북대학교. 그 격동의 반세기를 넘는 동안 건지벌은 그 어느 곳보다 민주화에 대한 뜨거운 열망 또한 컸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모교의 인사가 바로 이세종 열사.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고자 하는 장소도 있으니 그곳이 학생회관 앞의 이세종 광장. 이세종 열사는 우리 한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5.18 계엄군에 의해 전국 최초로 희생자였지만, ‘광주’라는 이름에 묻혀 지역적으로 소외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1990년 5월 21일 제868호 신문에서는 ‘그 어둠의 들불 이세종 열사!’라는 제목 아래 매년 5월이면 떠올리게 되는 1980년의 광주의 봄에 비춰 우리 대학의 전반적 상황과 이세종 열사의 삶을 다뤘다. 특히 광주항쟁으로부터 10년이 지난 그 시기까지 이세종 열사의 불확실한 사인 및 진실규명이 명확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어, 죽어서도 절규하고 있을 고인의 안타까움을 담았다. 실제 계엄군을 피해 제1학생회관 옥상으로 올라가던 이 열사는 18일 새벽, 피범벅의 주검으로 발견되었고 당시 고인의 죽음은 단순추락사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이세종 열사 추모비의 “그날, 새날이 올때까지/ 두 손에 횃불을 들고/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복판에 우리 불꽃으로/ 활활 타오릅시다”라는 구절처럼, 이세종 열사는 1999년 4월 5일 국가로부터 5.18 민중항쟁 희생자로 인정받아 광주 망월동 신묘역에 안치됐다.

‘대학의 발전, 민족의 미래, 지역의 희망’이라는 슬로건 아래 개교 50주년을 맞이한 1997년 10월 13일 제1042호 전북대신문에서는 ‘자랑스런 전북대인’으로 혼불의 작가 최명희 동문을 만나 인터뷰했다. 당시 최명희 작가를 인터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앙 일간지와 방송사 등의 모든 인터뷰를 거절한 채, 전라도의 한 유서 깊은 문중의 무너지는 종가를 지키며 치열하게 몸을 일으키는 종부(終傅) 3대와 천하고 남루한 상민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애환을 담은 ‘혼불’ 집필에만 치중하는 삶을 이어왔으니 말이다. 허나 모교 대학 신문사라는 이유만으로 그는 흔쾌히 장시간의 인터뷰를 수락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터뷰 시 “모교 전북대는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청년기를 바친 곳이자, 오랫동안 마음에만 담고 있던 청년기의 아름다웠던 꿈과 자신이 끊임없이 모색했던 세계를 다시금 기억하게 했던 고향의 텃밭”, “물고기의 크기는 비늘의 크기에 비례한다. 내 시간의 삶의 비늘을 사랑하는 일, 그것이 바로 문학을 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 등의 말을 하면서 작가의 순결한 모국어가 육성으로 느껴지는 시간이었다고 취재기자는 그 당시를 회상했다. 덧붙여 대학 후배라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 지를 새삼 일깨워 준 인터뷰였으며, 그 인연으로 담당기자는 작가의 열정과 저력이 고스란히 담긴 집결체인 혼불의 책장을 아니 넘길 수 없었다.

년 7월, 월간 조선은 ‘한국 학생운동의 대변혁 예고’라는 헤드라인 아래 ‘전남·전북·광주지역 대학총학생회의 북한 인권 운동 선언!’의 제목을 단 기사가 소개했다. 이 기사의 파장은 결코 적지 않았다. “모든 문제의 책임을 남한정권에게 책임 추궁하던 한총련은 북한 식량난의 책임을 왜 김정일 정권에게 묻지 않는가. 북한의 문제는 정치의 문제이고 영도자를 바꾸어야 해결된다”면서 소위 북한민주화 운동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이에 대한 찬반논란이 들끓었다. 그 당시 김대중 정부가 집권하면서 통일에 대한 염원이 점차 고조되는 시점에 김정일 정권 타도 운운하는 것에 사회각계의 큰 우려를 낳았기 때문. 이에 전북대신문은 문제의 월간조선 기사의 인터뷰 당사자이자, 북한민주화 운동의 맨 앞에 있던 우리학교 총학생회장과 전북총협(전북지역 대학 총학생회 협의회) 의장을 겸하고 있던 양준화 회장을 만나 대북정책에 대한 입장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국제사회의 흐름과 북한의 내부 사정을 고려했을 때, 북한 정권이 곧 무너질 것이라면서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남한식 흡수통일도 생각해볼 수 있는 통일방안이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나아가 그는 김정일 체제의 변화 없이 북한 동포의 생존은 있을 수 없다면서 북한민주화 운동을 계속 진행하겠다는 견해도 내놓았다. 이 기사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북한은 붕괴되지 않고 체제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데(더욱이 북미평화협정에 대한 논의까지 이뤄지고 있는데), 당시 ‘북한민주화’라는 단어가 주는 정치적 함의와 파장은 거셌다. 모교를 넘어 전국 대학가로 이어졌고, 이는 또 다시 사회각계의 비판과 비난으로 이어졌다. 북한민주화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던 당시 대북정책에 관한 뜨거운 키워드, 그것은 북한민주화운동이었다.

이영규(NEO E&M 기획팀장/사회·99)


2000년대∥급변하는 환경에서 모색의 과정을 담다

2000년대는 뉴 밀레니엄에 대한 희망과 우려, IMF, 인터넷과 핸드폰의 보급 등 사회, 경제, 문화 등 전체적으로 급변하던 시기였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 이미 인쇄매체는 힘을 읽어가고 있었고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신문을 두고 전북대신문 기자들은 고민했다.

유명인과의 인터뷰 또는 기고는 매체의 영향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그런 면에서 2001년 브루스 커밍스 교수(2001년 4월 16일자 1128호)와 송두율 교수(2001년 9월 3일자 1134호)를 이메일로 인터뷰한 이영규 기자의 기사는 특종이라 할만하다.

2000년 6·15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는 급류를 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조지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영규 기자는 이 정국을 국외의 전문가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었다고 한다. 시카고 대학 홈페이지에서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이메일 주소를 찾은 후 혹시나 하며 보냈던 메일에 답장이 왔다. 이 기자는 질문을 잔뜩 보냈고, 인터뷰는 그렇게 성사됐다. 송두율 교수와의 인터뷰 역시 마찬가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귀국조차 못하고 있던 송교수의 목소리가 전북대신문을 통해 고국에 전해졌다. 후일담에 따르면 인터뷰 이후 국내에 강연 온 브루스 커밍스 교수와 우연히 마주쳤다고 한다. 자신이 그 때 메일을 보냈던 기자라고 말하자 기억하고 있던 커밍스 교수가 반가워했다고.

2000년대 대학신문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학우들의 일상 속으로 다가갈까’였다. 이에 전북대신문은 일상의 기본인 의, 식, 주를 하나씩 파고들어가 봤다(건지인 의식주 프로젝트, 2003년 1166호~1168호). ‘주’에는 ‘원룸’에 대한 분석부터 학교 앞 자취형태별 주거여건 비교와 자취 주의사항을 담았다. ‘식’에는 건지인 식생활 습관조사와 인근 식당가의 변화, 영양사 추천 메뉴가 실렸다. ‘의’에는 당시의 의류 트렌드를 분석했다. 이 기획이 연재될 당시 참신한 시도라는 의견부터, 거창하지만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까지 여러 의견이 오갔다. 분명한 것은 학우들의 삶과 생활, 일상에 대해 보다 관심을 갖고, 기사화하기 시작한 계기였다는 사실이다.

2003년 초부터 부안은 격랑에 휩싸였다. 김종규 부안군수가 독단적으로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유치를 선언한 이후 부안주민들은 연일 촛불시위로 방폐장 반대를 외쳤다. 2003년 한 해 동안 전북대신문 기자들은 한주 걸러 한주 꼴로 부안으로 취재를 나갔다. 매 번 다른 형태로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기고부터 인터뷰, 현장스케치까지 다양한 형식을 활용했다. 1177호의 주제특집면은 그 총집편이다. 2면에 걸쳐 다각도에서 사안을 분석했고, 현장의 목소리는 물론 전문가들의 의견도 담고자 했다.

내용면에서는 그다지 새로울 게 없었다. 전문성은 기성언론이 더 높았고, 속보성과 현장성은 당시 주가를 올리던 인터넷 언론들이 나았다. 하지만 트럭을 얻어 타고 부안을 누볐던 경험, 버스를 놓쳐서 PC방에서 밤을 지새운 기억, 그리고 크고 뜨겁게 울렸던 주민들의 목소리만큼은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들의 가슴에 여전히 새겨져있다. 그게 바로 현장의 힘일 것이다.

2004년 ‘유쾌한 반란’ 총학생회는 학내 다양한 세력의 연합을 통해 당선된 총학생회였다. 2003년까지 오랜 기간 전북대 학생 자치조직들은 특정 세력이 독차지하다시피 해왔다. 그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여러 정파의 학생운동세력과 ‘비운동권’이라 불리던 이들까지 한 데 모여 ‘유쾌한 반란(2004년 3월 29일 1192호)’선본을 꾸렸다.

당선된 이들의 당면과제는 바로 등록금 투쟁이었다. 총학생회 간부 5명이 삭발하고 총학생회장은 단식에 들어갔다. 기성회 이사회까지 들어가 협상하고, 총장실까지 점거했지만 인상안은 변동이 없었다. 총학생회는 돌파구로 학생총회를 선택했다.

재학생의 10분의 1이 모여야 성사되는 학생총회는 학내 최고 의결기구이지만, 성사되지 못한다면 그만큼 총학생회의 입지가 타격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3월 24일 오후 3시, 당시 재학생 1만 8천여명의 10분의 1을 넘는 3천여명이 소운동장에 모였다. 개교 이래 최초로 성사된 학생총회였다. 이 자리에서 학생들은 등록금 동결을 비롯한 7가지 안건을 의결했다. 총회 후 대학본부로 행진한 학생들의 행렬 앞에서 당시 두재균 총장은 결국 재협상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학교 역사에 길이 기록될 현장의 목소리가 전북대 신문에 생생히 남아있다.

대동제 주점의 운영권의 추첨과정은 물론 이후 양도 매매까지 이뤄진다는 사실은 당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한 장씩 넣을 수 있는 추첨권을 타 동아리와 학과의 명의를 빌려 8장씩 집어넣는가 하면, 추첨 받은 운영권을 타 동아리나 학과에 판매하고, 24개의 주점 중 6개가 불법운영이었다는 사실이 1면(2006년 5월 15일 1242호)에 실렸다. 이 기사를 취재하기 위해 수습기자들까지 주점마다 들러 술을 마셔가며 실태를 파악했다고 한다. 세상을 바꾼 위대한 탐사보도들에 비할 수는 없어도, 전북대신문이 학교에서 해야 할 역할을 잘 보여준 기사다.

황재근(완주사회적경제네트워크 도시공동체팀장, 신문방송·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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