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 정읍을 방문하다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 정읍을 방문하다
  • 전북대신문
  • 승인 2019.10.16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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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이들을 위한 전북기행 ➄동학농민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 첫 번째]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 정읍을 방문하다

 

한 번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우리. 그러나 자가용이 없는 ‘뚜벅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뚜벅이족의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 전북대신문사가 직접 걸어 전북의 곳곳을 다녀봤다. 그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엮은이 밝힘>

▲온몸 가득 따뜻한 쌍화차 향이 차오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파랑새 중 – 작가 미상>

1894년 조선 말, 녹두장군이라 불리던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운동세력은 탐관오리 조병갑과 안핵사 이용태의 횡포에 반하는 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들은 드라마 <녹두꽃>에서도 다루며 화제가 됐다. 기자는 동학농민운동 시작점인 전라북도 정읍에서 동학농민운동의 흔적을 찾아 길을 나섰다.

오전 8시 반. 가을이 내음이 물씬 풍기고 맑은 하늘과 선선한 바람이 기자의 이번 여행을 반겼다. 정읍 여행을 준비 중이라면 반드시 대중교통 시간을 확인해야 한다. 동학농민운동의 유적지들이 생각보다 멀찍이 있고 버스 배차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유적지에서 정읍 시외버스터미널로 돌아오는 버스가 6시 반이면 끊기기에 일찍 출발하길 권한다. 전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한 시간 정도 이동하면 정읍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다. 요금은 4,300원이며 버스 간격은 10~20분이니 배차 시간 걱정은 덜어도 된다.

정읍에 가을이 찾아왔다는 이야기인지 쌀쌀한 아침 기온에 몸이 떨려왔다. 몸을 녹이고자 기자는 쌍화탕 한 잔 마시고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정읍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전설의 쌍화차 거리’까지 그리 멀지 않아 231번, 277번을 타고 이동하면 13분 만에 도착할 수 있다. 골목에 도착하자 쌍화차 향기로 가득하고 가게마다 7080세대의 다방을 떠올리게 하는 외향이 독특하게 느껴졌다. 가게 앞바닥마다 가게 이름을 써넣고 길에 쌍화차 속 재료들의 효능이 적혀있으니 하나하나 읽으며 걷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기자는 30년 전통이라는 ‘모두랑 쌍화탕’에 들어갔다. 어른 주먹보다 큰 곱돌 찻잔에 가득 채워진 쌍화탕은 냄새만으로도 온몸을 따뜻하게 해줬다. 공복에 마신 쌍화차였으나 숟가락으로 떠낼 때마다 수북이 올라오는 밤, 대추, 은행은 기자의 속을 든든하게 해주기에는 충분했다.

▲녹두장군의 생전과 사후를 바라보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까지 점령하니 위기를 느낀 정부가 청나라에 군사요청을 부탁했다. 정부의 요청에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자 톈진조약을 이유로 일본군도 조선 땅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런 모습에 동학농민군은 외국 군대 철병 및 폐정 개혁을 조건으로 조선 정부와 전주화약을 체결해 상황이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일본과 청은 조선 정부의 철병요구를 무시했으며 결국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운동 세력은 일본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2차 봉기를 벌였으나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과 연합한 관군에게 패배하게 된다. 그 후 전봉준은 피신을 다녔으나 끝내 서울로 압송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기자는 전봉준의 삶과 그 끝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기 위해 전봉준 생가와 단소를 찾아 나섰다. 정읍에 전봉준의 생가와 단소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전봉준 단소를 먼저 찾아가기 위해 ‘정읍동초등학교 앞’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단소와 생가가 있는 창동리와 장내리 쪽으로 가려면 122번 버스를 타면 된다. 그러나 길을 찾던 중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건 바로 한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갈 길이 먼 버스를 탔으나 지나치는 주변 밭과 도로를 바라보며 과거에 이곳을 종횡무진하는 농민군의 모습을 상상하니 금세 ‘조소’ 정류장에 도착했다.

단소는 정류장 바로 앞에 있어 헤매지 않고 찾을 수 있었다. 단소 앞에는 그가 치열하게 싸우며 지키려던 광활한 논밭이 평화롭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뒤편에는 소나무가 단소를 감싸 안듯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또한 주변에는 여러 비석이 있었는데 그 안에 전봉준을 상징하는 민요 ‘파랑새’의 가사가 새겨져 있었다. 단소에 오기 전 전봉준의 죽음에는 여러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재판을 받게 된 전봉준과 동학 간부들은 교수형에 처해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관군은 그들의 시체를 현재 단국대학교 구 서울캠퍼스 근처 야산에 임의로 매장해 시신이 유가족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의 시신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이에 그의 영을 기리고자 전봉준 후손을 자처한 천안 전씨가 1954년 전봉준의 재단과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공교롭게도 전봉준의 단소 부근에는 전봉준 생가가 있다. 초가집의 전봉준 생가는 지역주민들의 거주지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사적 제293호로 지정된 이 집은 방 1칸, 부엌 1칸, 광 1칸으로 이뤄져 있다. 집 주위에 흙담으로 두르고 그 앞에 집터 크기의 잔디를 심어놓았다.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인 전봉준의 생을 보여주듯 별다른 꾸밈없이 집만 덩그러니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현재 기자가 봤던 집은 고부 봉기 후 안핵사로 정읍에 오게 된 이용태가 동학 교인으로 지목되는 사람들의 집을 모조리 불 질러 타버렸기에 1970년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의 집 앞에는 ‘전봉준 선생 생가 우물’도 있으니 빼놓지 않고 보는 것도 중요하다.

▲농민군, 말목장터에서 일어나다

 

두 번째 목적지는 동학농민운동의 최초 봉기 장소인 말목장터로 정했다. 단소에서 내린 장소와 다른 큰길에 있는 ‘조소’ 정류장에서 122번을 타고 ‘이평면사무소’로 이동했다. 고부 봉기 당시 배들평 농민 수천 명이 고부로 가기 전에 모였던 장소로 이곳에는 큰 감나무 한 그루가 우뚝하게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감나무 아래 모인 농민들에게 전봉준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무리한 수세(水稅)징수와 만석보(萬石洑) 축조를 위해 농민들을 강제 동원하는 실정을 알리고 농민봉기의 필요성을 알렸다고 전해온다. 또한 말목장터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10호로 보호받고 있다. 감나무를 유심히 보던 기자는 이상하게 감나무의 크기가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알아보니 봉기 현장에 있었던 감나무는 지난 2003년 말라 죽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감나무는 지난 2005년 대체 식수한 감나무이며 죽은 감나무는 썩지 않도록 약품처리 후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옮겨 보존 중이라고 한다. 그곳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저 오래된 감나무가 역사와 함께 전해져 내려온다는 것에 조선 평민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아 기억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말목장터를 지나 다음 도착지는 ‘고부 관아터’였다. 내린 곳 반대의 ‘이평면사무소’에서 121번을 타고 30분간 이동하면 ‘장문’ 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 현재는 ‘고부초등학교’로 바뀌어 그때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운동장 한편에 초석과 기단석만 남아 이곳이 역사적 현장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일제가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말살하기 위해 관아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그 위에 초등학교를 세운 것이다. 둘러보던 와중 고부초등학교 앞 정자에 앉아있던 택시 기사가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곳들을 찾아다니냐며 동학농민운동의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풀어냈다. 그는 고부 관아가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상징적인 장소라며 초등학교로 변한 걸 아쉬워했다. 그래도 초등학교를 돌아가면 지방의 중등교육 및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된 고부 향교도 있다 해 둘러보고자 했으나 문이 잠겨 들어가 보지는 못 한 체 아쉽게 발걸음을 돌렸다.

정읍 쌍화차거리의 쌍화차

 

한편 고부관아터 부근에 고부관수 조병갑이 놀음을 즐겼다던 ‘군자정’이 있다. 이곳은 주변이 연꽃으로 둘러쌓여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냈는데, 한없이 소박했던 전봉준의 생가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재연 기자 jaeyeon1431@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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