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진 로맨스
제라진 로맨스
  • 전북대신문
  • 승인 2019.10.16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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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진 로맨스 5화.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별은 공항에서

차도 없이 다녀서 더더군다나 턱없이 컸던 제주도를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보는 일은 꽤 재미있었다. 조그만 땅 위에 점처럼 보이는 차들이 바삐 지나다니는 것을 보다가 바다는 미소를 띄우고 눈을 감았다. 밤을 새서 몹시 피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미소가 새어나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바다는 창가에 고개를 기댄 채 구름을 떠올렸다. 덩치만 봤을 때는 알 수 없었는데, 아주 여린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밤새 대화를 했는데, 구름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몇 번이나 멈칫하고 자신의 감성적인 면이 단점이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곤 했다. 그 때마다 바다는 웃으면서 그건 당신의 단점이 아니라 특징 중 하나일 뿐이라고 했고 새벽이 무르익었을 때쯤 구름은 그 말에 눈물을 글썽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흐름대로 흘러갔다. 최근의 정치판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나누다 뜬금없이 낮에 감상한 빛의 벙커 전시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어떤 주제든 간에 두 사람은 행복했다. 대화를 '나눈다'는 말을 몸소 느끼는 중이었다. 바다는 일방적으로 듣는 것에 익숙했고 구름은 대화 자체가 뜸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새삼 생경했다. 둘은 구름이 제 카페에서 빌려 온 담요 두 장을 들고 가까운 바닷가에서 밤새 파도소리를 들었다. 서로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파도소리면 충분한 밤이었다. 두 사람은 가끔 손을 잡기도 했고, 잡은 손등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 이상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았다.

문득 바다는 공항 로비에서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던 구름의 젖은 눈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연락처를 주고받지도 않았고, 주소라든지 SNS 계정이라든지 하는 일련의 그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바다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구름과 앉아 있었던 완연한 어둠의 바다에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 중간중간 끼어드는 파도소리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홀로서기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구름이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몇 년을 만난 그 사람보다 더 깊이 사랑에 빠졌음을 인정했다. 다만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자신이 또 주저앉아 구름에게 구조요청을 하게 될까 하는 우려가 들었을 뿐이었다. 언제든지 찾아드는 외로움을, 우울함을 혼자 갈무리할 줄 아는 감정적 홀로서기가 필요했다.

구름은 여전히 공항 로비에 앉아 있었다. 혹시 비행기가 고장나서 이륙을 못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바다가 억지로라도 돌아와야 하지 않을까? 그녀가 보고싶었고, 필요했다. 구름은 괜한 가정을 해 보다 이내 화가 났다. 연락처 정도는 알려줘도 되는 것 아닌가. 문득 바다의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벌게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자신 또한 아직 갓난아기라는 것을 깨달아버린 탓이었다.

벌써 몇 년이 지났어도 구름은 바다와의 만남을 기억했다. 떠오르는 대로 적은 이야기가 삽시간에 공책의 반절을 채웠다. 고작 이틀 동안 나눈 대화 치곤 버거울 정도의 양이었다. 단순히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서 바다가 그리운 것일까봐 몇 년을 참고 참았다. 처음 몇 달은 하루 종일 바다의 얼굴이 허공에 둥둥 떠 다녔고 그것은 차츰 옅어졌다. 그렇다고 그녀가 싫어진 건 아니었다. 바다는 고작 이틀 본 사람에 불과했지만 어느덧 그에게는 일종의, 안식처가 되어 있었다. 지난 몇 년간 그녀는 어떻게 변했을까? 찾을 수 있을까? 그는 이내 마음을 고쳐 잡았다. 단서는 널려 있다. 그의 공책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이, 영화가, 동네 카페가, 서점이, 빼곡하게 적혀 있으니까. 직감이 그를 안내할 것이다.

"어서 오세요. 아, 아니네."

바다는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차린 서점인데, 손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괜히 가을 바람이 불어서 썬캐쳐가 나무문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녀는 허공에 인사를 했다.

"한숨을 귀엽게 쉬면 손님이 늘어?"

"조용히 책이나 읽다 가라."

하루가 멀다 하고 서점 문이 닳도록 드나드는 단골손님이다. 그는 제법 잘생겼고 그녀에게 아낌없이 호감을 표현했지만 한 번도 효과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 연애를 일 주일도 쉬어본 적이 없다는 그의 자랑 아닌 자랑에 그녀는 웃고 말았다. 그가 외로울 때에만 서점에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다는 연애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쉬는 날 혼자 찾아가 듣는 바닷가의 파도소리가 좋았고 그 느낌을 공유할 상대가 있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아주 가끔, 드물게 했을 뿐이었다. 그때마다 구름을 떠올렸다. 지금도. 바다는 제주도에 찾아가 볼 때가 됐다는 생각을 했다.

썬캐쳐가 문을 툭, 치며 바깥 바람을 맞아들였다. 바다는 기계적으로 인사를 하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환각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다. 바다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망설이며 들어선 손님 또한 문을 열다가 말고 멈춰선 채 해사하게 웃었다. 문득 구름의 뒤통수가 해를 가렸다. 바다는 장난스레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손짓했다. 들어 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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