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부 소설 당선작]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대학부 소설 당선작]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 전북대신문
  • 승인 2019.10.16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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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나 동국대 문창 1

세상에 실종되는 것들은 무수해. 나의 매일은 사라짐, 혹은 없어져버림, 그런 사항의 연속이었다. 어제 먹다 남긴 푸딩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냉장고에 두었는데 아침이 되니 없었다. 나는 채소 칸의 요거트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푸딩은, 내 것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매일같이 세상은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분실한 것은 푸딩뿐만이 아니었다. 사람, 말하자면 20대 청년도 있었다. 그는 스물두 살의 대학생으로, 휴학생 신분이었다. 그는 입대를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보는 게 목표랬다. 근데 여기는 왜 왔어요? 부부동반으로 여행 온 50대 중년여성이 그에게 물었다. 여행 내내 결혼은 했느냐는 둥 아이는 있느냐는 둥, 지나치게 수다를 떨어 여행객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기피대상이었던 사람이었다. 여긴 왜 왔냐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배낭여행에 도전할 것이라면 패키지여행에는 왜 참가했는가.

무릇 가이드가 함께 하는 패키지여행은 중장년층이 애용하는 서비스였다. 더구나 내가 이끄는 패키지는 명실공히 효도관광이었다. 하루에 한 끼는 꼭 한식을 먹어야 했다. 지중해 나라에서 먹는 설렁탕은 찝찌레한 맛이 나는데, 그마저도 없으면 불만이 터져 나왔다. 관광시간도 짧아 사진을 찍기에만 적당한 수준이었다. 하루 반나절은 버스에서 보낼 정도로, 짧은 기간 안에 최대한 이동하며 다양한 포토스폿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고객들 대부분은 장성한 딸 아들을 키워낸 사람들이었다. 육아의 대가는 저렴하고, 그마저도 요즘은 수요가 줄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중 스물세 살의 청년은 이질적이었다. 그는 젊었고, 그보다 어린 편에 가까웠다. 그는 곤란한 듯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대답했다. 예행연습 같은 거죠. 그리고는 이가 드러나도록 씨익 웃었다. 머리가 짧게 뻗쳐 있어서 얼굴이 더 앳되어 보였다. 짧게 들린 코하며, 주름진 입술도 그랬다. 젊음이란 예행연습이 가능한 거구나. 그런 나이였다. 이탈리아의 건조한 볕이 청년의 얼굴을 비스듬히 사사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목이 늘어난 상의를 털어냈다. 빛나는 젊음에 비한다면 나라는 인간은 참으로 빈곤하구나.

그랬던 그가 사라진 건 오늘 새벽 즈음이었다. 분명 어제저녁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무런 낌새가 없었다. 그는 설렁탕을 먹으며 내일 있을 출국이 아쉽다고 말했고, 일찍 자야겠다며 한술 뜨다 말고 객실로 향했다. 나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사람들을 인솔해 객실로 올려 보냈다. 나와 청년을 제외한 사람들은 설렁탕을 전부 비운 채였다. 새벽에, 나는 설렁탕 맛이 계속 입안을 맴돌아 두 번이나 양치를 하고 잠에 들었다. 비행을 앞둔 날은 항상 선잠을 자서, 밤중에도 두세 번 정도 깼다. 베로나에서 밝아오는 새벽은 여름이지만 선선했고, 건조하리만치 메말라 있었다.

다음날 버스는 아홉시에 출발이었다. 근처 관광지에 들렀다가 베니스 공항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일행 모두가 정각에 모였는데, 그만 없었다. 일정 내내 지각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모두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운 뒤 객실 문을 두드렸다. 아직 주무시나요? 이제 출발해야 합니다. 그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문고리도 걸려 있었다. 나는 초조해져서 문을 빠르게 노크했다. 시간이 늦어지면 곤란합니다. 나는 계속 두드렸다. 건너편은 여전히, 끝까지 응답이 없었다. 인내심은 금세 동이 났다. 나는 주먹을 쥐어 문을 두드리면서 당신 하나가 모두의 시간을 뺏고 있다고 화를 냈다. 문을 두드릴 때마다 굳게 고정된 쇳소리가 들렸다. 복도에는 화가 난 내 목소리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 선연한 쇳소리만이 울렸다. 그땐, 이상하게도 세상에 낡은 문 하나와 나만이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나는 멈췄다. 머리털이 비죽 섰다. 인간은 상당한 불행을 예견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지나가는 벨 보이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데스크 직원이 가져온 스페어 키로 문을 열었을 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침구는 정돈되어 있었고 실내용 슬리퍼는 가지런했다. 옷장은 비워져있었고 건조하게 말라 있는 화장실은 사용한 흔적이 전무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복도 CCTV에 그가 목격됐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유유히 호텔을 빠져나가는 모습이었다. 네 시 정도의 일이었으며, 내가 잠에 들었다가 일어나 다시 이를 닦았던 시간이었다. 이것은 정말로 상당한 불행이었다. 오늘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그를 두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건 실종이었다. 대형 사고라는 말이었다. 베로나에서 실종된 20대. 가이드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물론 이를 닦고 있었습니다. 나는 기자든, 형사든, 나를 압박하는 모든 것들 앞에서 대꾸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일순 너무나 억울해졌다. 나는 그저 이를 닦았을 뿐이었다. 설렁탕이 너무 맛없어서!

그를 찾아야 했다. 일이 잘못됐다간 잘릴 게 뻔했다. 그뿐이랴. 기자든 형사든 나를 물어뜯지 못해 안달이 날 것이다. 결국 나는 관광객을 먼저 보내고 남았다. 보조 가이드가 버스 입구에서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애써 웃었으나 멀어지는 버스 뒤꽁무니를 바라볼수록 숨이 막혀왔다. 버스는 너무나도 멀었다.

감상에 젖을 시간은 충분치 않았다. 나는 움직여야 했고, 그리하여 그와 함께 돌아가야 했다. 그는 이 나라가 처음이라고 했으니 멀리 가진 못했을 게 분명했다. 나는 호텔리어가 보이는 족족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물었다. 혹시 이런 사람 보았나요? 머리가 짧고, 검은 머리입니다. 동양인치고 덩치가 크고 코가 짧아요. 들창코예요. 입술은 두껍고요, 외까풀입니다. 두 유 노우 댓 가이? 호텔의 누구도 그의 행방을 몰랐다. 새벽 내내 그를 봤다는 사람도 없었다. 그만큼 키가 큰 동양인은 눈에 띄기 마련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진 게 아니라면 누구라도 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카프리 섬으로 향하는 일정이 있었던 둘째 날이 떠올랐다. 청년이 뱃멀미로 섬까지 들어가지 못했던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단둘이 대화를 나눴다. 시시한 신변잡기가 이어졌고, 그는 야구를 했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선출이었다고, 실업팀에 들어가고 싶었다고 그랬다. 지금은 뭐하시는 데요? 내가 묻자 그는 두꺼운 입술을 다물고 웃었다. 그냥 대학 다니죠. 부상 때문에 야구 안 해요. 막연히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쯤이라고 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남들 다 하는 배낭여행이나 해보려고 마음먹었단다. 도피성으로 여행을 오는 사람은 흔했다. 뭐라고 위로를 해줄까. 생각을 비우고 여행 와서 보는 것에만 집중하라고? 그런 때는 금방 지나간다고? 나는 고민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정말 덩치가 컸다. 신장도 신장이지만 무엇보다 운동을 게을리하는 몸이 아니었다. 야구를 그만두었다고는 하지만, 미련이 없어 보이진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야구를 그만뒀다는 손끝이 저만치 부르텄겠는가. 나는 얕은 위로를 못하는 사람이었고, 우리 사이에는 한참 정적이 흘렀다. 그는 어쩐지 편안해 보였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을 때, 그는 멀미가 가라앉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앉아서 올려다보았던 그는 무척이나 크고 높았다. 청년을 올려다보았으나, 이탈리아의 강렬한 볕 아래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고맙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랬었지. 당시 그에게 느꼈던 연민이 다시금 입안을 쓰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정말로 내가 그와 함께 여행했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갑자기 지난 닷새가 너무나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인천공항에서 만나 함께 비행기를 타고 로마에서 내렸던 우리 중에, 사실 그는 처음부터 없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가 묵었던 객실 앞에서 402호라고 쓰인 명패를 한참 바라보았다. 먼지처럼 사라져버린 그를 생각하면서 오래도록 비워진 402호를 떠올리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어쩌면 세상은,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없는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호텔 근처에 그가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결국 가벼운 짐만 들고 호텔에서 벗어났다. 낡은 슬링백에는 약간의 현금과 카드, 여분 배터리와 생수, 오래된 여권만 있었다. 베로나에서 오래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느지막하게라도 오늘 안에 베니스에서 비행기를 타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나는 계속 그의 얼굴을 곱씹어보았다. 외까풀에, 눈썹이 짙은 밤톨머리. 아이처럼 어린 얼굴이 어른거렸다.

호텔을 벗어나 근처 공원으로 발을 재촉했다. 도심지 속 근린공원은 항상 사람이 많았다. 그는 거기 있을 확률이 높았다. 혼자 있노라면 사람이 향하는 곳으로 이끌리기 마련이니까. 공원으로 향하는 행렬에 몸을 묻었다. 관광객이 많았다. 가이드를 따라 일렬종대로 선 그들과, 그들과, 또 그들뿐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홀로 관광지에 남아있는 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생경한 감각에 걸음을 멈추고 싶었으나, 머뭇대기에는 나를 떠미는 사람들이 있어 멈출 수 없었다. 튜브를 탄 부랑자처럼 떠내려가면서 나는 힘을 주고 중심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안락한 일인지 깨달았다. 선봉에 서있지 않는다는 건 참으로 가벼운 일이었다.

공원은 여름풀 내음이 우거져 있었다. 짙은 녹음이 발치에 서성거렸다. 공원에도 역시 외까풀에 큰 덩치를 가진 동양인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땀이 흘렀다. 식은땀인지 더운 땀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새 해가 한낮이었다. 이탈리아의 정오는 건조하고 뜨거웠다. 그늘 벤치에 앉아 땀을 닦았다. 땀이 스민 눈이 따가워서 눈물이 고였다. 네 시 비행기니까, 적어도 두 시에는 공항으로 가야 하는데, 불가능해 보였다. 혼자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행사에 사실을 전해야 할지도 몰랐다. 알려야 할까. 그래야 할까. 대사관에도 알려야 하나? 그랬다간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텐데. 잘릴 수도 있었다. 아니, 잘릴 것이다. 휴직을 쓰는 기혼여성만큼 자르기 쉬운 존재는 없었다. 일을 다시 시작한 건 오로지 내 욕심이었다. 가족을 볼 낯도 없었다. 결국, 이토록 보잘것없는 자리인 것을. 대신할 사람은 수없이 많고, 나는 작아서, 문득 내가 지구에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세상은 모를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종종 내가 지구상에서 사라짐을 상상했다. 상상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눈을 감고 떠올린다. 내가 없고, 그러고도 너무 멀쩡한 세상과 지구를. 특히 결혼하고 난 뒤로 자주 그런 상상을 했다. 결혼은 내가 없어지는 과정이었다. 나는 냉장고 밖으로 꺼내진 푸딩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해가는 것이다.

이 년 전 결혼한 남편은 내게 딱 적당했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나는 내 상황에 그보다 더 나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못했다. 그는 나보다 두 살 많았고, 중소기업에 재직 중이었다. 우리는 지하철역 근처의 헬스장에서 만났다. 나는 서른 중반에 들어서 부쩍 체력이 떨어진 것을 느끼고 운동을 시작한 참이었다. 배운 것도 아는 것도 없었던 내게 가장 만만했던 종목이 헬스였다. 이만 원을 할인해주겠다는 말에 과감하게 삼 개월을 먼저 등록했는데, 호기로운 시작과 다르게 일주일에 채 세 번도 나가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특히 가이드 일정이 겹치는 때에는 일주일 내내 날리는 경우도 있었다. 운동은 힘들기만 할 뿐 상쾌한 느낌이 없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러닝머신과 사이클뿐이라 그런 것 같았다. 해서 처음으로 웨이트 트레이닝에 도전했던 날이 있었다. 벤치 프레스 위에 누워 안간힘을 쓰던 나를 말렸던 게 그였다.

 

그는 잦은 회식 탓에 술배가 나와 운동을 시작한 거랬다. 운동을 가르쳐주며 우리는 제법 친해졌다. 한 달에 보름도 못 나오는 나와 다르게 남편은 매일같이 출석도장을 찍었다. 야근을 한 날에는 잠시 들러 샤워라도 하고 가는 식이었다. 삼 개월 회비 이십삼만 원이 아깝지 않은 남자였다. 야무지고 생활력이 강했다. 그런 점이 사랑스럽게 느껴졌을 무렵에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마흔을 눈앞에 둔 나이라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평범한 연애였다. 연애를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엄마는 결혼을 재촉했는데, 그 역시 다른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가끔씩 스쳐 지나가는 척 결혼 얘기를 꺼냈고, 나도 그게 불쾌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타박하는 소리를 듣다보니 나이가 나이인지라 마지막 연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가 내 마지막 사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는 무좀과 약간의 탈모기가 있었고, 나는 만성 변비를 앓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우리는 떠밀리듯 결혼했다. 연애 11개월째의 일이었다.

처음 만난 그의 가족은 내게 어떠한 호불호도 없는 상태였다. 객관적인 눈으로 나를 평가하는 시선은 견디기 힘든 종류였다. 그는 실없이 웃기만 하면서 분위기를 중재하는 법은 몰랐다. 다행인 것은 나에게도 영원한 내 편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속이 조이면 엄마 손을 잡았다. 손을 가장 세게 잡았던 순간은 남편이 지방유지 땅 부자 집안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때였다. 그 순간 내가 사랑한 누군가는 없어진 것 같았다.

그 날 처음 알게 된 사실은 많았다. 우리는 생각보다 서로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성급하고 경솔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남편 가족들이 날 탐탁지 않아 한다는 점도, 그가 부유한 집안이라는 점도, 그리고 사실 내가 임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나는 그 날 알았다. 그의 가족들은 은근히 내게 일을 그만두길 종용했다. 일을 그만두고 늙기 전에 아이를 낳으라는 뜻이었다. 무례함에 화가 나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남편은 물론이고 영원한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엄마마저 마찬가지였다. 딸을 가졌다는 이유로 엄마는 죄인이었다. 홀로 딸을 키운 여자라는 사실은 엄마를 더 작아지게 만들었다.

세상은 온통 불공평한 일뿐이야. 약혼까지 마친 사이에 남편에게 결혼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남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펄쩍 뛰었다. 이미 집도 다 알아봤고 청첩장도 돌렸잖아. 남편은 어린애를 어르듯 나를 달랬다. 나는 마냥 사랑스러웠던 그의 성실함이 원망스러워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영원한 내 편이었던 엄마도 그 순간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다. 엄마는 파혼을 극구 반대했다. 일은 그만둬. 애는 낳아두면 정 붙어. 얼마나 예쁜지 낳아보면 안다. 아니? 혼자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 건지. 나는 엄마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인파 속에서 혼자 남은 아이처럼 울어버리면서, 나는 정말이지 엄마가 사라져버린 기분이었다.

 

엄마도 그땐 몰랐겠지. 살아가면서 알게 됐겠지. 나이가 들수록 엄마와 내가 동일시 되어갔다. 예전엔 마냥 이해할 수 없었던 어른의 세계였는데, 이젠 뭘 하더라도 엄마도 이랬을까 하는 생각만 났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는 어땠을까. 나는 여태껏 엄마가 울거나 당황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언제나 침착했고 담담했다. 늙어갈수록 유약해졌지만 내가 어렸을 땐 키가 큰 나무 같은 어른이었다. 그걸 닮고 싶었는데.

나는 멍하니 인파를 바라보았다. 행렬은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하나로 뭉쳐진 거대한 덩어리 같았다. 무수해서 아득해졌다. 이럴 때 엄마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무리 엄마라도 이럴 땐 울고 말았을까? 그때, 멀리 20대 청년 같은 그림자가 언뜻 스쳤다 인파들 사이로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사람을 밀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같은 색의 배낭을 멘 뒤통수가 낯익었다. 사라진 그였다. 그여야만 했다. 정신없이 사람을 헤치고 달리자 근처에서 욕설 섞인 비난이 들려왔다. 언어가 달라서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심한 말임이 분명했다. 누군가가 억세게 내 팔뚝을 잡아챘다. 덩치가 큰 서양인으로, 머리가 반쯤 벗겨진 남자였다. 그는 내 얼굴에 침을 튀겨가며 욕을 뱉었다. 사람들을 밀치고 지나가는 나를 비난하는 말이었다. 나는 급한 일이 있어 미안하다며 팔뚝을 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건장한 남성에게는 역부족이었다. 남성이 잡은 팔뚝이 아팠다. 제발, 제발. 나도 모르게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알 유 차이니즈? 남성이 물었다. 명백한 인종차별에도 나는 남자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뒤돌아봤을 때, 남자는 흔적도 없었다. 사라져있었다.

왜 세상에는 온통 사라지는 것들뿐인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목이 메고 코가 아리더니 눈물이 울컥 튀어나왔다. 남자는 당황한 듯이 눈치를 살피다가 앞으로는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멀어졌다. 사람들이 구경거리처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거리낌 없이 눈물을 닦고 걷기 시작했다.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기묘한 안도감이, 부끄러운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만들었다. 타지라는 공간은 두려우면서도 매력적이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고, 그래서 나를 얽매는 것도 없고, 내가 알고 나를 아는 것들도 없음에서 오는 역설적인 자유로움. 나고 자란 고향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어쩌면 이 역설을 좇아 여기까지 온 걸지도 몰랐다. 평생 이 자유를 따라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사라진 남자를 찾기 위해 정처 없이 걸었다. 이탈리아의 땡볕 아래 그저 걷기만 했다. 공원은 넓고 복잡해서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었다. 한참 걷다 보니 공중 화장실이 보였다. 2유로를 내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 어느 날에, 매일같이 변기를 붙잡고 신물을 토해내기 바빴던 그런 나날이 생각났다. 현기증이 느껴져 비틀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배를 쥐었다. 이젠 납작하기만 한 아랫배가 헐렁했다. 내 몸은 확실히 가벼워졌다. 고작 몇 그램짜리 생명이 사라졌다고 지나치게 가벼워져 있었다. 나는 문득, 이대로 내가 점점 가벼워지다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무게를 잃고 가뿐해지면서 나는 떠오르고 세상은 발치 아래로 아득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사라진다. 늘 상상해왔던 대로.

결혼생활은 나를 잃어가는 과정 같았다. 어쩌면 부케를 든 그 날부터 나는 사라져 버렸는지도 몰랐다. 난임도, 언제 그만둬야 할지 모르는 직장도 전부 견딜 수 없었다. 남편의 중재자 역할은 형편없었다. 대부분의 상황에 그는 나를 사랑해주지만 비호해주진 않았다. 좋은 남자였지만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은연중에 남편마저도 아이를 원했고, 임신 테스트기 결과에 줄줄이 실망을 금치 못했다. 자궁 막이 약해서 착상이 어려운 거예요. 의사가 설명했으나 남편은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다며 일을 쉬어보라고 말했다. 화를 내자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는 듯했으나 임신에 성공한 이후로 다시 강요하기 시작했다.

 

임신을 알게 되었던 날엔 이상하게 세상이 일그러져 보였다. 호르몬 변화로 감정적으로 변했고, 몸이 점점 바뀌어갔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가 바뀌는 게, 내가 사라지는 게 두려웠다. 입덧이 심해서 자주 밥을 굶었다. 먹을 수 있는 건 푸딩뿐이었다. 임신 전엔 도통 단것을 못 먹었는데 입맛이 바뀐 것이다. 유산 위험이 크다는 말에 모두가 합심하고 직장을 그만두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9주째에 임신 휴직을 내야 했는데, 엄마는 아예 그만두지 뭐하러 눈치 보이게 휴직을 쓰냐고 타박했다. 남편도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때문에 내 일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쓰렸다. 부른 배로만 받는 존중과 배려가 나라는 인간을 지워버리는 것 같았다.

밥을 잘 먹지 못해서 남편이 자주 죽을 쑤어주었다. 잘게 쑨 죽에 브로콜리와 당근을 썰어서 예쁘게 했는데, 문제는 내가 먹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남편은 먹지 못하는 나를 걱정하는 건지 아이를 걱정하는 건지 매일 억지로 무언가를 먹이려고 들었다. 나는 매일 먹기도 전에 토하고, 먹고 나서도 토했다. 토해낼 것이 없어서 위산만 토해내는 날이 잦았다. 속이 매일 쓰렸고 얼굴이 계속 부었다. 남편은 지쳐가는 것 같았다. 나 또한 지쳐가고 있었다. 몸은 무거웠고 기분은 오락가락했다. 속도 관절도 성한 데가 없어 짜증이 늘었다. 배가 불러갈수록 몸은 더 나빠졌다. 말초부위가 저려서 자다 깨는 일이 빈번했는데, 그럴 때마다 비행기를 타는 꿈을 꿨다. 꿈에선 배가 납작해서 이코노미 좌석에 몸을 좁힐 수 있었다. 나는 무릎을 가슴 가까이 끌어안았고, 작은 창밖으로는 구름이 발아래 있었다. 빈 곳 없이 단단한 밀도를 가져서 손에 잡힐 듯한 새하얀 구름이었다. 구름 위를 거니는 상상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어딘지 모를 도시에 서 있었다. 이국적인 유적과 성당이 가득히 혼재한 곳이었다. 나는 여름 샌들을 신고, 챙이 긴 모자를 쓴 채였다. 조금 걸으면 바다가 보였다. 바다 위에는 하늘에서 보았던 단단한 구름들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꿈들이었다. 깨고 나면 손끝이 저릿한.

임신 이후 오히려 살이 빠졌다. 20주에 접어들었을 땐 6키로가 빠져있었다. 그래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복통에 하혈이 와서 병원에 가니, 유산이랬다. 한동안은 심장이 뜯겨져 나간 듯이 허한 감정이 느껴졌다. 작은 세포가, 떨어져 나가면서 몸속 장기를 모조리 긁어간 것 같았다. 낳아놓으면 정이 붙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온몸으로 느껴졌다. 엄마는 알고 있었겠지. 말도 없이 친정으로 내려갔더니 엄마가 담담하게 안아주었다. 친정에서 한 달간 요양하겠다는 나를 남편도 이해해주었다. 한 달 동안 나는 어린애가 되어 살았다.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내가 살았던 방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엄마가 해주는 청소를 받았다. 따뜻한 흰 쌀밥에 고구마 순으로 만든 김치를 얹어서 먹으면 식도와 위장부터 시작해서 뜯겨나간 내장들이 다시금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살았던 방은 이제 내 물건이 아닌 엄마의 물건들로 채워져 있었다. 낡고, 헤진 물건들. 그래서 더 버릴 수 없는 것들로만.

 

어느 날 저녁에는 엄마가 계란말이를 해주었다. 당근과 파가 듬뿍 들어간 계란말이였다. 어릴 땐 정말 자주 먹었는데… 내가 웅얼거리자 엄마가 미안하다고 그랬다. 제대로 도시락 한 번 해준 적 없었던 게 마음에 걸렸댔다. 이상한 일이었다. 엄마가 미안해하는 도시락이 내게는 마냥 좋았으니. 물을 잔뜩 타서 싱거워진 계란말이가, 나는 좋기만 했었다. 우리는 조용히 저녁 식사를 마쳤다. 좁은 식탁은 말이 없어도 빠듯했다.

저녁을 마친 뒤 엄마는 옷장 위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커다란 사진 앨범이었다. 탄 듯한 흑백 사진 속에는 갓 태어난 내가 있었다. 작게 태어나서 걱정이었어. 주름진 손끝이 사진을 어루만졌다. 무디게 닳아 예쁜 손은 아니었다. 흑백으로 시작된 앨범은 뒤로 갈수록 색이 더해졌다. 바통을 들고 찍은 운동회 날, 역시 반찬이라고는 계란말이뿐인 그날의 도시락. 매일의 우리가 있었다. 대부분 엄마는 당시 일했던 방적 공장 작업복을 입고, 나는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내 키가 자랄 때마다 채워진 사진 앨범은 고등학교 졸업식 이후 비워져 있었다. 졸업 이후 나는 전문대학에 입학해 따로 살았었다. 앨범은 아직도 비워진 장이 수없이 남아있었다. 앨범의 공백은 당신의 인생이 모조리 나로 귀결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엄마는 한참이나 고등학교 졸업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엄마는 젊었고 나는 어렸다. 빛나는 젊음과 치기 어린 어림이었다. 그때 나는, 내가 뭐라도 할 수 있을 줄만 알았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될 거라고 믿었다. 세상엔 나보다 모자란 멍청이들이 널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 나는 세상에 널린 멍청이들만도 못한 사람이었다. 당신에게만큼은 당당한 딸이고 싶었는데 세상은, 내 발밑은 자꾸만 헐거워졌다. 흐려지고 사라져 갔다. 그래서 나는 자꾸 자빠지고 미끄러지는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한참 사진을 들여다보던 엄마는 이윽고 앨범 맨 뒷장을 펼쳤다.

그곳에는 우표가 끼워져 있었다. 다양한 우표들은 내가 여행지에서 하나씩 사다가 선물한 것이었다. 엄마가 손가락으로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자그마치 21개였고, 우표 아래에는 나라 이름이 쓰여 있었다. 요즘 기억이 오락가락해. 엄마가 변명하듯 말했다. 나라 이름 따위는 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기차가 그려진 우표는 어디서 샀는지 생각도 안 났다. 일이 아닌 여행으로 다녀왔던 러시아에서 사 온, 곰이 그려진 우표만 또렷이 기억 날 뿐이었다. 그날도 우표는커녕 엄마의 단정한 글씨체만 오래도록 잔상처럼 기억에 남았다.

일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급히 집을 나서자 돌아오는 차 한가득 엄마가 반찬을 챙겨주었다. 임신하고 도통 먹을 수 없었던, 깻잎절임이나 고추 장아찌처럼 짭짤한 반찬들이었다. 울었으니까 소금기를 채워줘야 해. 알겠니? 엄마는 이렇게 가르치듯 말하는 투를 자주 썼다. 나는 아직도 아이였다.

이 주 만에 돌아온 이른 귀가에 남편은 기뻐했다. 나는 짐을 풀기도 전에 남편에게 일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해해줄 줄 알았던 남편이 불같이 화를 냈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해 유산됐기에 안 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떡해. 이 김에 일이라도 하면 덜 허전할 것 같아.” “이 김에? 어째 그걸 바랐다는 듯이 들린다.” 남편의 말이 기껏 채워온 장기를 흠씬 긁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날카롭고 둔탁했다. 나이를 먹어 남들보다 현명할 거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 되는 말들만 지혜롭게 골라서 할 수 있었다. 내가 고른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이 말이었다. 임신도 내가 하고 애도 내가 낳는데, 당신이 뭔데 강요해?

이후로 우리 사이는 냉랭했다. 내가 복직을 신청하고 바로 이탈리아로 떠나게 됐을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출국하면 일주일은 못 볼 텐데. 출근 준비를 마치며 멀거니 닫힌 침실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집을 함께 쓰기만 할 뿐 어떠한 정서적 교류도 없었다. 집을 나서며 나는, 내가 혼자라고 생각했다. 내장이 허해서 속이 온통 헐렁했다. 공항으로 향하는 새벽길은 너무나 적막했다. 지구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외롭기만 했다. 여기는 어슴푸레한 푸른 별이었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디오로 노래를 틀었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유어 낫 얼론. 노래를 웅얼대며 공항까지 차를 몰았다. 차창 밖으로 기러기인지 갈매기인지 알 수 없는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하늘을 점처럼 메운 새들을 보며 노래를 부르다가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그랬지. 나는 공원을 돌아보았다. 여기는 혼자 달리던 공항 도로의 대척점이었고, 사람은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나는 혼자라는 건 사실 말도 안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지구가 이만큼 크고, 사람도 이만치 많은데, 사람은 혼자일 수 있는가. 그래, 유어 낫 얼론이다.

‘유어 낫 얼론’을 나지막하게 흥얼거리며 걷고 있을 무렵이었다. 모르는 가사는 대충 한국어로 흥얼거렸다. 바짓가랑이가 당기는 느낌에 고개를 숙였더니 어린 남자아이가 있었다. 고작해야 다섯 살쯤 되어보였다. 눈동자는 짙은 갈색이었고 머리칼은 검은색이었다. 한국에서 유명한 애니메이션이 그려진 캡 모자도 쓰고 있었다. 한국인이었다.

듣자하니 혼자랬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아이는 다시 내 바지를 당겼다. 손이 온통 흙먼지라 바지에 손때가 묻었다. 엄마가 없어요. 엄마를 찾아달라는 말이었다. 참으로 당돌한 꼬마가 아닐 수 없었다. 낙오된 아이치고 의연한 모습이어서 나도 덩달아 긴장감이 느슨해졌다. 부모를 함께 찾아줄 시간은 부족했다. 나는 아이가 메고 있는 작은 메신저 백을 뒤져 휴대폰을 찾았다. 로밍이 되어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연락처를 찾아 메시지를 보냈다. 대충 엄마에게, 공원 화장실 근처에 있다는 문자였다. 그런 뒤 여기서 엄마를 기다리라고 달래주었다. 아이는 함께 있어 달라고 웅얼거렸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바빠서 안 되겠구나.

왜요?

찾고 있는 게 있어서.

그게 뭔데요?

저 나잇대 애들은 온통 궁금한 것투성이라던데 정말이었다. 사회인들 사이에선 쉬이 볼 수 없는 무례한 질문에 나는 입을 닫았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세상에 몹시 많아서 오히려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참 뒤에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푸딩…, 어제 먹다 남긴 푸딩.

어제 먹다 남긴 푸딩은 근처 유명한 베이커리에서 구매한 것이었다. 타르트와 푸딩이 유명했는데, 특히 생크림 푸딩은 하루에 200개만 팔았다. 그것을 사기 위해 새벽같이 바지런히 움직여야만 했다. 사실 단 건 질색하면서도. 입덧 때문에 먹을 수 있었던 건 고작 푸딩뿐이었던 그때가 떠올랐다. 푸딩 이야기를 꺼내자 아이는 화색이 돌았다. 아이는 바나나 푸딩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푸딩에 바나나를 얹어 만드는 건데, 엄마가 자주 만들어준다고 덧붙였다. 빨리 자리를 떠야 하는데 기회가 없었다. 아이는 계속 말했고 주제는 시시각각 바뀌었다. 내년에 태어날 동생 얘기를 하던 게 방금이었는데 이제는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캡 모자에 그려진 로봇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하고서 동화 중에서는 인어공주가 제일 재미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인어공주가 거품으로 변해 사라지는 게 진짜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 없이 하늘을 보았다.

얼굴에서 땀이 말라갔다. 시간은 어느새 정오를 지나쳐 해가 누그러지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몸을 부드럽게 감싸자, 그때서야 나는 결국 여기에 그가 없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리를 옮기자. 다른 곳에서 그를 찾아야 했다. 이젠 정말 남은 시간이 없었다. 우리 이제 헤어져야 해. 알겠니? 여기서 얌전히 엄마만 기다려. 알겠어? 여린 어깨를 세게 휘어잡고 채근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인어공주는 정말 사라진 건가요? 하고 또 물었다. 나는 불쑥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인어공주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거품이 되든지 크림이 되든지 푸딩이 되든지.

“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 이제 인정해. 너도 알잖니?”

참다못해 나는 크게 화를 냈다. 말을 뱉고 나서 눈물이 핑 돌았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인정해야 할 건 나였다. 괜한 화풀이도 관둬야 옳았다. 이제 여행사에 말해 대처를 하고 대사관에 실종자 발생을 전해야 했다. 잘리든 말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책임이라는 건, 인파 사이에서도 중심을 지킨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해야 함을 해낸 뒤에, 그리하여 나는 이 창백한 푸른 점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나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감정을 삭였다. 가슴께부터 시작된 소용돌이가 온통 집어삼킬 것처럼 포악했다. 숨이 막혔다.

“울지 마세요.”

그때 아이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작은 손이 손가락을 완전히 감싸서 나는 일순 뜨거움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이의 너그러운 얼굴이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워 보였다. 말간 눈동자가 티 없이 맑았다. 운 적도 없는데 울지 말라고 위로하는 통에, 나는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키 큰 나무 같은 어른은 여기에 없었다. 나는 아이를 두고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잰걸음에 아이는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나는 정말이지 뛰듯이 달렸다. 말랐던 땀이 다시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웬만큼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뒤돌아보았을 때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탈력감이 들었다. 몸이 무거웠다. 건조한 바람이 불었다. 한국과는 다른, 물기 없는 여름 바람이었다. 아이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똑똑해 보였으니 현명하게 행동하겠지. 아이는 나를 기억할까. 자신을 놔두고 떠나간 볼썽사나운 어른을 미래에도 기억해낼까. 나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인어공주를 사랑했던 아이를 떠올렸다. 아이는 자라면 푸딩을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 인어공주를 사랑했음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 나와 한참 대화를 나누었던 사실도 잊어버리겠지. 시간은 사람을 마모시킨다.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 달라지고야 만다. 그러니 늙어간다는 것은 결국 잃어버림, 이 아닌가.

왜 나는 계속 무언가를 잃어버리기만 하는가.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남자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이젠 들지 않았다. 목적지도 도착지도 없었다. 그냥 걸었다. 그러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공원을 나가려는데 출구에서 케밥을 팔고 있었다. 가방을 뒤져 동전 세 개를 찾아냈다. 케밥을 샀다.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에 이곳에서 항상 케밥을 판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먹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음식을 건네받아 천천히 한입 물었다. 씹었다. 삼켰다. 적당히 달고 짠 고기가 식도를 넘어갔다. 내 뒤에는 케밥을 사기 위해 기다리는 관광객이 있었다. 등산 배낭을 멘 서양인이었다. 발음을 보아 미국인인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음식을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는 다시 공원으로 돌아가 케밥을 먹으며 새를 구경했다. 카메라를 꺼내 찍기까지 했다. 그가 찍고 있는 것은 가슴털이 붉은 새였다. 무슨 새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함께 새를 응시했다. 그는 한참이나 새를 찍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새를 보았고, 카메라를 보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는 배낭여행을 떠난 걸까. 나는 문득 사라진 남자가 떠올랐다. 케밥에서 묘하게 마늘 맛이 나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배낭여행을 가고 싶다던 그는 지금쯤 유럽 어딘가에 있겠지. 자유를 따라 진작 국경을 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에게 포르투갈은 꼭 가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왜냐면, 거기가 정말 좋거든. 내가 알아. 아이가 태어나면 같이 가고 싶었던 곳이라서 알아.

사진을 찍던 미국인은 카메라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리를 옮기려는 모양이었다. 그를 따라갈까, 하다가 시계를 보고 자리에 멈추어 섰다. 저 멀리 비행기가 뜨는 엔진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한국을 향해서, 활주로와 마찰하는 바퀴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다. 그때 미국인이 나를 힐끔 보았다. 제법 떨어져 있어서 나를 모를 줄 알았는데 그가 카메라 가방을 추스르며 다가왔다. 그는 내게 새의 이름이 로빈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는 나를 두고 멀어졌다. 없어졌다.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새도 날았다. 거대한 하늘에 몸을 누이고 점처럼 사라졌다.

흔적도 찾을 수 없고,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 나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끝을 모르고 넓게 펼쳐진 하늘은 지구보다 거대했다. 하늘은 전부 지켜보고 있겠지. 세상이 실종하고야 마는 수많은 것들을 알고 있겠지. 구름이, 잇자국 남은 푸딩처럼, 웅크린 태아 모양을 하고 흘렀다. 눈을 감았다. 내가 잃어버리고 세상이 실종해버린 모든 것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결국, 내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되어버린 채로.

 


<대학소설 부문 수상소감>

그렇기에 오래 머무르는 것들

 

장유나 동국대 문창 1

아끼던 물건이 사라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릴 때의 일입니다. 그토록 어렸던 날에도,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는 그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세상이 상실해버린, 그런 것들을 떠올리다가 이 소설을 쓰게 됐습니다.

소설을 쓰는 과정은 일정량의 불확실성을 동반합니다. 그저 쓰고 싶다는 열망 하나에 의지해 지금까지 오긴 했지만, 망설이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미지수의 경계에서 언제나 고민했고 이따금 우울했습니다. 때문에 당선이 더욱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 나아가고 있긴 하다. 당선 연락을 받았을 때 가장 처음 들었던 생각은 그것이었습니다. 표 묘한 영역 안에, 가끔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면서 어찌어찌 나아가고 있습니다. 덕분에 글을 생각하면 느껴지던 조급함이 덜해진 기분입니다. 오래 씹을수록 달게 느껴지는 음식이 있듯이, 느리게 찍히는 발자국들이 나의 맛이고 표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족한 글임에도 눈여겨 봐주신 최명희 청년소설문학상에 감사드립니다.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앞으로도 문학에 진지하게 임할 생각입니다. 소설을 봐주신 박진규(박생강)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더 나은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늘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기회로 조금이나마 믿음을 드릴 수 있어서 기쁜 마음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왜 그리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늘 서로를 이끌어주면서, 어떻게든 나아가고 있긴 한 장미철에게. 셋이기에 가능해진 일이 분명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는 우리의 바로미터가 되어 주자.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만, 그렇기에 오래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지금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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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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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2 14:11:08
너무 멋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