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 아이는 울지 않는다] 3. 기억나다
[연재소설 | 아이는 울지 않는다] 3. 기억나다
  • 전북대신문
  • 승인 2017.11.29 14: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이는 반지를 남자에게 받아 살펴보았다. 반지 안쪽에 윤미숙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이는 반지를 남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주머니에 쏙 넣어버렸다. 당황할 법도 한데 남자는 전혀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한 쪽은 아이였다.
“이 반지를 어디서 구한 거야?”
“아버지에게 받은 거야.”
“아버지?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받았어.”
“이 반지는 내 거야.”
“그 말도 맞지.”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받은 것뿐이야. 원래 내 것은 아니었어.”
아이는 조심히, 그리고 천천히 반지를 다시 꺼내어 살펴보았다. 반지에는 여태까지 없었던 무수한 실금들이 새겨져 있었다. 함부로 다루어서 생긴 상처들이라 착각할 수 있겠지만 함부로 다루어서 생긴 상처들은 결코 아니었다. 금반지에 난 흔적들은 세월이 남기고 간 흔적들이었다. 세월이 패고 간 흔적들은 언제나 부드러웠다. 날카롭게 흠이 간 부분마저 닳고 닳아 뭉툭해져서 모난 데 없는 상처들이었다.
“이건 내가 아는 반지인데 내가 아는 반지가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잃어버린 반지가 맞는데, 내가 잃어버린 반지는 이렇게 오래되지 않았어.”
“내가 아버지에게 받은 반지는 이것뿐이야.”
“나는 어머니에게 받은 반지를 말하고 있는 거야.”
“그 사람은 내 어머니가 아닌걸. 나는 아버지에게 받은 반지를 말하고 있는 거야.”
“아저씨의 아버지가 누군데?”
“…….”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깜빡거리는 가로등을 보았다. 자꾸 깜빡거리니 신경이 쓰였다. 남자도 그랬나 보다.
아이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주변을 바라보았다. 멋진 빌딩들로 가득했다. 반지는 이렇게 긁히고 닳아졌지만 반대로 세상은 완벽해져 갔다. 사람들은 그새 흙에서 콘크리트로 옮겨갔다. 사쿠라에서 블루진, 트로트에서 팝송으로 옮겨갔다. 모두가 흙에서 떠나 수직으로 옮겨가는 가운데에서도 아이는 수평의 삶을 살았다. 어머니는 아직도 거기에 계셨다. 지금도 눈감으면 그 지평선에서, 있는 것이라곤 푸른 하늘과 논밭밖에 없는 풍경 속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어머니가 서 계셨다. 개똥이가 있고, 한쪽에는 땔감으로 가져온 마들가리가 묶여있고, 그 풍경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 아이는 길을 걸어가는 내내 어머니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찾았다.
이제 아이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왜 이 남자가 자신을 따라다녔고, 왜 자신의 반지를 들고 있었던 것인지, 왜 어머니는 오지 못하고 반지에는 이렇게 세월이 묻어있는 것인지. 앎은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찾아온 것이 아니라 되찾아온 것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금반지를 닮아 세월에 깊게 파인 손이었다.
“가져갈 거야?”
남자가 말했다. 아이는 금반지를 한참 동안 매만지다가 반지를 남자에게 돌려주었다.
“아니 이 반지는 아저씨에게 어울릴 테니까 가져가.”
“금반지도 찾았으니까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는 없어. 나는 기차를 기다려야 해.”
“기차는 아까 지나간 게 마지막이야.”
“나도 알아.”
오랫동안 둘 사이에 말이 없었다. 남자는 당황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담뱃갑을 쥐었다 넣기를 반복했다. 아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는지 오랜만에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있잖아. 내가 아저씨의 아빠에게 후레자식이라고 말했던 거. 생각해보니 틀린 말인 거 같아.”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은데?”
남자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이의 표정이 괜스레 샐쭉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거 같아. 아저씨의 아버지는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었을 거야.”
“좋은 사람이지.”

김영한 국어국문•1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