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명인을 만나다-34 여산 호산춘 이연호 명인]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술을 빚습니다
[전북의 명인을 만나다-34 여산 호산춘 이연호 명인]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술을 빚습니다
  • 전북대신문
  • 승인 2018.05.09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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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선생이 사랑한 술 ‘여산 호산춘’
스물다섯 나이에 어머니께 전수받아
사업은 거절…술로 돈 벌 생각 없어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가. 꿈을 향해 발을 딛는 것이 두려운가.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전북대신문이 다양한 분야의 멘토들을 만나봤다. 자신이 정한 길에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고 담담히 역량을 키워나가 결국은 ‘명인’의 칭호를 얻은 사람들이 바로 그 주인공. 전북대신문에서 그들의 삶과 열정을 전하려 한다. <엮은이 밝힘>



지역을 대표하는 국문학자이자 시조시인인 가람 이병기 선생은 생전에 스스로를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 칭했다. 여기에서 삼복은 각각 화초, 제자, 술 복을 의미한다. 가람 선생에게 술 복을 가져다 준 것은 바로 여산 호산춘이다.


호산춘은 가람 선생의 25대 조부인 이현려 선생이 고려 의종 때에 관직을 맡으며 빚은 술로, 궁중에서 임금이 마시던 술로 명망이 높았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4대명주로 손꼽히며 가람선생의 집안인 연안이씨 가문 내에서 제조기법이 전승됐다. 이연호(74) 명인은 가람 선생의 조카인 어머니 이경희 여사로부터 제조기법을 전수받았다.



▲소년, 호산춘에 빠지다.


처음 맞이한 명인의 모습은 당당한 풍채와 호화로운 의상에서 멋을 뿜는 노년의 신사였다. 세련되고 화려한 모습이 왠지 전통주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과 맞지 않는 듯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같은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전통주 빚는 사람이라고 화려하게 입지 말라는 법이 있나요. 방송이나 신문에서 취재를 오면 개량한복을 입어달라는 요청을 받지만 오히려 개량한복이 어색해요. 이게 제 모습입니다.”

▲ 정자에서 누룩을 만지고 있는 이연호 명인, 봄과 가을에는 바로 이 정자에서 누룩을 띄운다.

사연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의 이력은 유독 특이했다. 운동선수, 공무원이라는 경력은 술빚기와는 아무 접점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 특이한 경력이 술과 가까워질 기회를 제공했다고 한다. 유년기에 형제들은 모두 손에 펜을 쥐었지만 유일하게 이 명인만 손에 펜싱 칼을 쥐면서 운동선수의 길을 걸었다.


공부하는 형제들에게 술 심부름을 시킬 수는 없었던 어머니가 모든 것을 오롯이 이 명인에게 맡겼고 이때 그는 호산춘의 향취를 접하며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맞이한 스물다섯의 나이에 마침내 이 명인은 어머니로부터 호산춘 빚는 기술을 전수받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본인이 만들게 된 술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당시 저에게 호산춘은 그냥 어머니께서 만드는 술이었어요. 궁중에서 마시던 수백 년 역사의 귀한 술인지는 모르고 그저 마음이 끌려서 배운 거죠.”


기술을 전수받은 이후로는 본업에 충실하면서 틈틈이 호산춘을 빚었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좋은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즐거움에 빠져 술을 빚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했는데 어느덧 복숭아꽃 향기에 나비와 벌이 몰려들듯 맛을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이 술을 마실 때면 이 명인에게 호산춘을 청하게 됐다. 복숭아꽃에 익충만 몰려들지는 않듯 호산춘에서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도 적잖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양조장을 차리면 큰돈을 만질 수 있다면서 이 명인에게 사업을 제의했다.


달콤한 꾐에 마음이 혹할 만도했지만 이 명인은 모든 사업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40년간 술을 만들어 왔지만 그 가르침에 돈 버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금전에 욕심 부리지 말고 멋지게 살라는 것이 돌아가신 어머님의 가르침입니다. 돈에 연연해서 술을 만들 생각은 지금도 없어요. 원한다면 기술을 가르쳐 줄 수는 있지만 사업은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만드는 가양주


지금은 양조장이나 공장에서 만든 술을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리 전통에는 집에서 직접 술을 빚어 먹는 풍습이 있었다. 이렇게 집에서 빚는 술을 가양주라 부르는데 가양주는 술을 빚은 집안에 따라 각각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호산춘도 가양주로서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첫 번째 특징은 술을 세 번에 걸쳐 빚어내는 ‘삼양주’다. 막걸리 등의 일반적인 발효주는 물과 누룩에 쌀죽을 한 번만 섞어 발효시키는데 반해 호산춘은 수일간 세 차례에 걸쳐 쌀죽을 누룩과 물에 섞어 발효시킨다. 이를 통해 누룩의 효모가 더 많은 전분을 먹고 술의 깊은 맛과 높은 도수를 만들어 낸다.


두 번째 특징은 ‘누룩’이다. 누룩은 술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재료로 다른 곳에서 사용하는 누룩이 지붕의 처마나 실내에서 띄워 만드는데 반해 호산춘의 누룩은 연못을 접한 정자에 띄워 만든다고 한다. 이렇게 누룩을 띄워 놓으면 연못의 습기를 머금은 최상품 누룩이 만들어진다. 지금 이 명인이 사는 집에도 정자와 연못이 있다. 조경을 즐기는 가풍에 따라 만들었고, 꼭 누룩 띄울 것을 생각해 만든 곳은 아니지만 항상 적당한 때가 되면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방식대로 연못 옆 정자에 누룩을 띄우고 있다. “지금은 온도가 높아서 시기가 맞지 않지만 봄이나 가을이 오면 적절한 날씨에 그 방식 그대로 연못 옆 정자에 누룩을 띄우고 있어요.”



▲뛰어난 술의 내일을 이어가다


호산춘은 대중적인 유명세를 타는 술은 아니다. 하지만 지난 2013년 농림축산식품부가 개최한 ‘궁중 술 빚기 대회’에서 긴 역사를 자랑하는 수많은 술과 경쟁해 대상을 받으면서 역사에 기록된 그 맛이 허언이 아님을 증명했다. 올해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이 명인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그때 세상이 알아준다는 뿌듯함이나 명예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고 한다. 외가에서는 이미 명맥이 끊겨 본인 혼자서 호산춘의 역사를 이어가는 위태로운 상황이었지만 이제 전북이 이름을 걸고 지키는 만큼 호산춘이 사라질 염려는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문헌과 관련성이 없는 술을 이름만 베껴서 공장에서 만들어 장사하던 사람들도 있었어요. 이렇듯 호산춘은 위기를 여러 번 겪은 술입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후 제가 물려받은 유산이 없어지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죠.”


문화재 지정 이외에도 이 명인은 호산춘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배우겠다는 사람만 있으면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전국 어디든지 찾아가 교육과 기술전수를 하고 있으며 호산춘에 애정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호산춘 연구보존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익산시와 연계해 호산춘을 지역특산물로 만들 방안도 구상하고 있다.


그는 40년간 매주 술을 만들어왔지만 평생을 함께한 아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아내에게 감사를 표했다. “안사람이 아니었다면 호산춘을 지금까지 이어오지 못했을 거예요. 그 방대한 역사를 저 혼자 감당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인생의 동반자에게 언제나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민욱 기자 molee1221@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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