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소년, 호기심을 갖다
6장. 소년, 호기심을 갖다
  • 전북대신문
  • 승인 2018.05.16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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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은 스스로 ‘예술을 한다’는 자부심에 사로잡힌 집단이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고통과 슬픔은 큰 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추구하는 예술의 밑거름으로 여겼다. 술을 한 잔 기울일 때면 으레 고통스러운 과거가 훌륭한 안주였다. ‘짝사랑’이 주제로 주어지면 누가 더 자신의 마음을 재단도 하지 않고 무식하게 내주었는지 치열하게 경쟁했다. 나는 그 경쟁을 내심 비웃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체내에 흡수하며 맥주로 목을 축였다. 그저 듣기만 하는데도 그 경험들을 내 것으로 만드는 데는 꽤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나는 점점 목이 말랐다. 내가 알지 못하는 감정을 그들은 알고 있었고, 나 또한 생생하게 느끼고픈 욕망이 자라났다. 오로지 생존을 앞세우느라 감정이라는 것을 그저 사치로 생각했던 나날들이 부질없이 생각되었다. 무엇이든 지나고 나면 그 가치가 퇴색되는 법이라지만.
나는 무작정 사랑을 시작하기로 했다. ‘사랑’이란 의문스럽고도 가장 알고 싶은 것이었기에. 낮에는 극단에서 연습을 했고 밤이면 그 근처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바에서 일을 했다. 급여가 생각보다 낮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것을 모아 단칸방이라도 구할 생각이었고, 무엇보다 바에서 마주치는 여성들을 원했다. 그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좋은 향이 난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서는 깨끗한 비누향이 났고 가끔은 매혹적인 장미향, 한 입 베어 물고픈 복숭아나 사과향도 났다. 일이 끝나면 늘 다른 향을 풍기는 여자와 밤을 보냈다. 아침이면 그들에게서 아무 향이 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눈을 뜨기 전에 늘 침대 밖을 벗어났고 또 밤이 되면 병이라도 걸린 양 다른 향을 찾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욕망’이 곧 ‘사랑’이리라고 생각했다.
“어서 오세요~”
“어? 너 여기서 일해?”
어느 날은 극단의 선배가 예쁘장한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 들어왔다. 입버릇처럼 딸랑거리는 종소리에 맞춰 인사를 제창하던 내가 그를 보고 눈인사를 건넨 뒤 얌전히 그의 뒤에 매달려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렇게 번쩍이는 공간은 낯설다는 듯이 큰 눈을 이리저리 돌리는 모습에서 묘하게 어머니가 보였다. 바로 맞은편에 앉은 그녀에게서는 참기름 냄새도, 분 냄새도 나지 않았지만 어머니와 닮아 있었다. 선배는 그녀를 제 옆에 앉혀놓았으면서 정작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바삐 움직였다. 가슴 부분이 당장 터질 것처럼 꽉 끼는 셔츠를 입은 여자 바텐더나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배에 힘을 주어야 할 것처럼 꼭 맞는 원피스를 입은 손님에게로. 그녀는 이런 상황에 제법 길이 들었다는 듯이 선배가 추천해 시킨 무알콜 칵테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모습은 몹시 기묘했다. 함께 들어와 붙어 앉아있지만 시선이 서로를 향해 있지는 않으니. 선배가 담배를 들어 보이며 자리를 비우자 나는 슬그머니 그녀의 앞에 섰다.
“심심하시죠?”
“네… 뭐.”
“형님이 늘 여자 친구 자랑을 엄청 하시던데, 듣던 대로 예쁘세요.”
아부성이 짙은 말을 들은 그녀의 표정이 뚜렷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물론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불쾌해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거, 제 얘기 아닐걸요.”
“네?”
“저 여자 친구 아니에요.”
덤덤하게 하는 말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더욱 이상한 것이 아닌가. 여자 친구가 아니라면 몰래 만나는 사이 정도일 텐데 왜 그의 홀대를 애써 참고 있는 것일까. 언제든 떠나면 그만 아닌가. 나는 그녀가 궁금했지만 때마침 들어서는 다른 손님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선배는 담배를 한 대 태우는 것 치고는 너무 오랜 시간을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녀는 칵테일에 입 한 번 대지 않고 끈질기게 기다렸지만 결국 바를 닫을 시간이 될 때까지 그녀의 옆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술 한 잔 하자고 슬쩍 말을 건네 보았다. 당연히 돌아설 줄 알았지만 그녀는 순순히 나를 따랐다. 초라한 모텔 방에 소주와 과자 몇 봉지를 사들고 들어서자 그녀는 제 집인 양 침대에 제 몸을 뉘였다.
“술 안 먹어도 되죠?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그녀와 있으니 그저 놀람의 연속이었다. 물론 오늘 밤을 그녀와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녀가 먼저 그런 말을 입에 담으니 문득 쑥스러움이 밀려왔다.
“근데 몇 살이에요? 한… 스물 다섯?”
“스물 둘이요. 그쪽은요?”
“스물 넷. 되게 노안이네. 누나니까 말 놓는다?”
그녀에게는 이상하게 아주 사소한 것조차 진실만을 말하게 되었다. 한 번도 이름이나 나이를 순순히 말해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그녀를 테이블로 데리고 와 앉혔다. 그녀에게는 음료를 하나 꺼내 쥐어주었고 나는 소주를 까 병에 입을 대고 한 모금을 마셨다.
“얘기나 해요.”
“내가 그렇게 매력 없니?”
“그럴 리가요. 그냥 궁금해서.”
“그래, 그럼.”
나는 처음으로 여자와 아무 일 없이 밤을 샜다. 우리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가정사와 나의 가정사를 털어놓으며 나는 그녀가 왜 어머니와 닮아 보였는지를 깨달았다. 그녀의 눈매에 짙게 밴 불안감 탓이었다. 술 한 모금 먹지 않은 채 제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더니 결국 눈물마저 고이는 눈매에서는 내 혈관에도 타고 흐르는 그 감각이 선연히 묻어 있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눈매에 입을 맞추었다.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눈을 마주보며 입술에도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눈꼬리를 가늘게 휘며 웃더니 내게 다가와 작은 품 가득 나를 안아주었다. 아주 오랜만에, 완전한 밤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한 침대에서 잤다. 그냥 잠만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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