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명인을 만나다 - 39 판소리 적벽가 성준숙 명인]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 판소리, 널리 알리고 싶어
[전북의 명인을 만나다 - 39 판소리 적벽가 성준숙 명인]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 판소리, 널리 알리고 싶어
  • 전북대신문
  • 승인 2018.09.1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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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거센 반대에도 그저 판소리가 좋아 입문
뒤늦은 시작으로 쉰 목…끝없는 노력으로 극복
위기 속에서도 묵묵히 판소리 공부 이어갈 것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가. 꿈을 향해 발을 딛는 것이 두려운가.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전북대신문이 다양한 분야의 멘토들을 만나봤다. 자신이 정한 길에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고 담담히 역량을 키워나가 결국은 ‘명인’의 칭호를 얻은 사람들이 바로 그 주인공. 전북대신문에서 그들의 삶과 열정을 전하려 한다. <엮은이 밝힘>

▲그저 좋아 시작하게 된 판소리
무더운 날들이 이어진 지난 8월, 풍남문 광장을 지나 골목을 따라 들어가 행원카페에 도착했다. 일본식 한옥 구조를 띄고 있는 그곳에서 판소리 적병가 무형문화재 성준숙 명인을 만날 수 있었다. 행원은 전쟁 때 생계유지가 어렵거나 피난 온 예술가들의 공간이었다. 성 명인은 지난 1983년 행원을 인수해 지금은 국악의 풍류를 즐길 수 있는 한옥 카페로 단장해 운영하고 있다.


전주에서 나고 자란 성 명인은 어린 시절 판소리가 그저 좋았다. 때로는 한없이 부드러럽게, 때로는 씩씩한 남정네의 소리로 판소리는 성 명인의 마음을 울렸다. 특히 판소리의 한 부분인 창극이 너무 좋았다. 창극은 한명의 소리꾼이 공연을 펼치는 판소리와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창극은 여러 명의 소리꾼이 배역을 맡아 연극을 하는 것으로 어린 소녀는 볼거리와 들을 거리가 어우러진 창극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가 그의 판소리 길을 막았다. “옛날에는 판소리를 나쁘게 생각했다”는 성 명인은 “그래서 아버지께서 반대를 많이 하셨다”라고 말했다. 성 명인은 그 길로 판소리와는 잠시 이별한 채 여느 학생과 다름없는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다 성 명인이 27살이 되던 해 문득, 판소리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대통령상을 타기 위해 몰래 판소리를 다시 시작했다”는 성 명인은 “그 상을 받으면 판소리를 허락 하실 것 같아 시작했는데 금방 들통이 났고 이번에는 작은아버지가 소리를 다시 시작했다고 혼을 내셨다”라고 말했다. 집안의 거센 반대가 있었지만 성 명인은 담대하게 외쳤다. “나 판소리해서 대통령상 받을 거야”라고. 어떠한 장벽도 성 명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산전수전 겪으며 명창의 길 올라
반대를 무릎 쓰고 어렵게 시작한 판소리였지만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어렸을 때의 목 상태와 나이 들어서의 상태는 다르지 않냐”라는 성 명인은 당시 쉰 목 때문에 소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바람을 불어도 바람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성 명인은 판소리 오바탕 중 심청가를 가장 먼저 완창 했다. 그는 “완창을 했는데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라고 회상했다. 한 권을 완창하기 위해 6시간이나 되는 시간을 오로지 홀로 소리와 함께해야 했다.

한 권을 하고나면 힘도 빠지고 지치기 일쑤였다. 이렇게 힘들면 지칠 법도 한데 성 명인은 오히려 심청가를 완창한 후 판소리 공부 욕심이 더 불타올랐다. 심청가에 이어 성 명인은 33세 때 흥보가를 완창 했다. 45세 때는 수궁가를, 46세 때는 적벽가를 완창해 오바탕 모두를 섭렵했다.
그런 성 명인은 1986년에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그토록 바라던 대통령상을 수

상한다. 지금과 달리 당시는 전주대사습놀이와 남원 춘향제 두 대회에서만 대통령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성 명인은 “그 대통령상을 타기 위해 수 없이 연습을 했다. 맨 처음 대통령상을 바라보고 판소리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 때의 기쁨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라며 웃어 보였다. 성 명인은 전주 대사습놀이 장원 수상을 통해 국악계에 입문할 수 있었다. 그리곤 명창의 길로 들어섰다. 명창의 반열에 오른 성 명인은 이후 중앙대, 목원대에 나가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대전은 다른 지역만큼 국악이 특성화 돼있지 않았다”라는 성 명인은 “내 제자들을 데리고 목원대 국악과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대전에서는 목원대에서 처음 국악과가 생겼다. 30년을 넘게 출강해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힘썼다”고 말했다.

 


▲득음은 없는 것
득음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물음에 성준숙 명인은 “득음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소리를 얻는다는 뜻. 성 명인은 “옛날 분들은 득음을 하면 새소리가 나서 새가 와서 앉는다고들 말씀하셨다. 득음이라는 것은 어느 경지에 올라갔을 때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득음은 없는 것 같다. 이 말은 판소리가 그만큼 얼마나 힘들다는 것이겠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즉 소리는 끝없이 노력하고 올라가야 하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판소리. 그래서 판소리는 전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고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음악이다. 성 명인은 “외국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악기를 조금씩 다루는 경우는 있어도 판소리만큼은 따라할 수가 없다. 그만큼 판소리는 어려워 우리나라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어려운 판소리를 공부하기 위해 성 명인은 말 그대로 피나는 노력을 했다. “책 한 권을 끝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냐”는 성 명인은 “선생님을 모시고 산으로 가 석달하고도 열흘 동안 100일 공부를 수행한다. 산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와서도 공부를 이어가야하는 것이 판소리”라며 연습의 어려움을 전했다.

▲후배들에게 전하는 말
학교에 나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은 전주 대사습 이사장을 맡으며 그만뒀다. 이후 성 명인은 5년 동안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이사장을 역임하고 지난해 이사장직 또한 끝났다. 앞으로는 후학양성과 더불어 자신의 판소리 공부를 다시 할 예정이다. “이제 제자들도 상을 타고 직장에 들어갔다”며 “다시 내 판소리 공부를 이어갈 것”이라고 배움의 의지를 선보였다.


성 명인은 판소리를 하는 후배들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덧붙였다. “앞으로는 정말 판소리가 어려워질 것이다”라는 성 명인은 “현재도 국악과 현대노래가 함께 섞여 이어나가고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국악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현재의 실정에서 그럴수록 더 공부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큰돈을 들여 대학에서 국악과를 전공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더욱 안타깝다. 국악과를 나와도 딱히 갈 곳이 없는 현재 실정. “그럴수록 파고들며 공부를 더해야한다”라는 말을 강조하며 판소리 본연의 공부에 충실해야한다고 말했다.


서도경 기자 dgseo611@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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