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NU 교양 100선 읽기프로젝트 17 알베르 카뮈 『이방인』
CBNU 교양 100선 읽기프로젝트 17 알베르 카뮈 『이방인』
  • 전북대신문
  • 승인 2018.10.1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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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대한 정다운 무관심에 관심을 두다

▲ 이러나저러나 인간은 모두 사형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죽음에 관한 소설이다. 인간이라면 결국 경험하게 되는 죽음의 큰 울타리 안에서 이 소설은 처음과 중간 그리고 끝에 죽음의 의미와 상징을 전략적으로 배치한다. 주인공 뫼르소가 맨 처음 경험하게 되는 어머니의 죽음은 소설의 1부를 이루고, 2부에서는 자신이 피의자가 되는 아랍인의 살인사건이 다뤄진다. 소설의 마지막은 아직 실행되지 않은 뫼르소의 사형선고 장면을 이야기함으로써 부조리한 죽음이 갖는 삶의 의미를 다양하게 확장한다.


이 소설에서 우리가 맨 처음 마주하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다. 소설 속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어머니의 죽음은 뫼르소가 감내해야 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신호탄으로 사용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문장을 처음 마주하게 되는 독자라면 다소 어리둥절할 것이다. 어머니가 죽은 날짜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매정한 자식의 모습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잠을 자고, 장례식 이후 찾아올 휴식에 대해 기대한다거나, 옛 동료였던 마리를 만나 해수욕을 하고 코미디 영화를 보고, 급기야는 자신의 집에서 동침하는 모습은 어떤가. 뫼르소의 일련의 행동들은 얼핏 비상식적으로까지 보인다. 하지만 뫼르소의 인식 속에서 이러한 행동들은 그의 말마따나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인 생으로 귀결된다.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인 뫼르소의 행동은 이후 자신이 직접 목격하게 되는 ‘살인사건’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뫼르소는 바닷가에서 아랍인과 대치하고 있을 때 ‘총을 쏠 수도 있고 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맨 처음 레몽의 총격을 말렸던 뫼르소가 샘가에서 두 번째로 아랍인을 마주쳤을 때 그는 ‘태양’으로 인해 총격을 가한다. 뫼르소의 행동 저변에는 자신도 어머니와 같은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한다. 그래서 그는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 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말하자면 뫼르소가 총을 쏜 대상은 아랍인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엄습해 오는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이었던 셈이다. 자기 생에 찾아드는 죽음과 불안은 아랍인의 몸을 통해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 함께 뫼르소의 삶을 관통한다.


세 번째 죽음은 재판정에서 타자에 의해 규명받게 되는 뫼르소 자신의 죽음이다. 이 죽음은 마치 예견이라도 하듯 뫼르소의 이름에 운명처럼 각인된다. ‘뫼르소’(Meursault)는 ‘살인(meurtre)’과 ‘태양(soleil)’의 뜻이 조합된 이름이다. 처음부터 뫼르소는 누군가를 살인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있던 것이다. 그런 운명 속에서 그는 재판정에서 타자에 의해 자기 죽음을 규명받게 된다. 이 와중에도 뫼르소는 자신의 목숨을 구명하려는 의지를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서른 살에 죽든지 예순 살에 죽든지’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통해 그는 ‘어차피 누구나 죽는 이상, 어떻게 그리고 언제 죽는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치부해버린다. 다만 뫼르소는 자신의 처형일 날 모쪼록 많은 구경꾼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자신을 맞이해주기를 소망할 뿐이다.

▲ 구경꾼 많은 세상의 이방인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유형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라는 충격적인 첫 문장이 좋아서이고, 두 번째 유형은 ‘태양 때문에 살인을 했다’는 주인공 뫼르소의 독백이 ‘그저’ 좋아서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후자에 속하지만, 누군가에게 이 소설을 추천할 때는 주저하지 않고 두 가지 이유를 모두 설명한다. 이 두 문장 사이에서의 형성되는 죽음의 긴장은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는 ‘모순의 힘’을 내포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이라는 공간과 아랍인을 죽인 후 뫼르소가 서야 했던 재판장,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있을 사형장은 모두 뫼르소와 같은 ‘구경꾼’이 모여 죽음을 목격하기 좋은 장소로 대변된다.


눈 밝은 독자라면 이미 눈치챘겠지만, 뫼르소가 목격하고 체감하고 있는 세 가지의 죽음은 모두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 속에서 이루어진다.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한 장례식장과 아랍인을 살해하고 만나게 되는 재판정, 그리고 자신의 사형 집행 과정에서 자신의 죽음을 목격할 사형장이 그 곳이다. 소설의 구조상 각 구경꾼의 성격은 모두 다르겠지만, 결국 타자의 죽음을 통해 나 자신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소설의 맨 첫 구절을 통해 어머니의 죽음을 통보받았던 뫼르소도 결국 어머니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는 ‘구경꾼’ 중 한 명이다.


뫼르소를 통해 상징되는 구경꾼의 모습은 다시 재판정의 사람들로, 결론에 이르러 ‘나’의 죽음을 증오와 함성으로 목격해야 하는 구경꾼으로 재편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죽음은 사실상 ‘나’의 죽음과 ‘타자’의 죽음이 한 울타리 안에 가둬진다. 다만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의 문제일 뿐이며, 죽은 사람에게는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 사건으로 인식될 뿐이다. 얼핏 보면 이 말은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뉘앙스를 지닌다. 만약 인간이 동전의 앞면을 들여다본다면 동전의 뒷면을, 뒷면을 들여다보는 동안에는 절대 앞면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죽음에 대한 괴리감은 이 소설의 작가인 카뮈에게 더욱 근본적인 의식작용을 불러온다. 죽음 앞에서 한없이 방관하게 되는 불안과 낯섦은 자기 자신을 타인처럼 느끼게 하거나, 관계에 대한 허무함을 증폭시킨다. 이러한 감정이 반복되고 증폭될수록 인간은 자신의 삶 속에서 부조리한 감정을 싹틔우게 되고, 결국 세계에 대한 허무로 연결된다. 바로 여기에서 한 세계와 인간 사이의 기막힌 부조리가 형성된다. 카뮈는 이를 두고 “나와 세계를 묶어 놓는 유일한 관계는 부조리의 관계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확실히 만져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관계의 대립, 단절, 모순, 혼돈, 낯섦, 즉 부조리뿐이다”라고 역설한다.

이방인을 읽으며 카뮈의 철학을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인간 스스로 죽음을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 대해 뫼르소가 경험하고 지향했던 것처럼 죽음에 대한 투박한 결론 하나 쯤은 도출시킬 필요가 있다. 살아서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고, 반면 죽어서는 더 이상의 의식 활동을 기대할 수 없는 죽음의 부조리를 통해 인간 운명의 한 페이지를 들춰본다면 이방인을 읽는 의미는 배가 될 것이다.

만약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주인공 뫼르소가 처한 삶이 이해된다면 이 소설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반대로 뫼르소의 일련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 역시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 소설의 끝에서 뫼르소가 이야기하고 있듯이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다.’ 다만 모두가 세계에 대한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나’의 죽음과 ‘타자’의 죽음이 절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면, 뫼르소는 다시는 어머니와 태양과 자신을 향해 총을 쏘지 않을 것이다.

김정배 (글마음조각가, 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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