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산업을 영호남 대표기업으로 키운 국중하(기계공학·62년 졸) 대표이사 회장]배우는 자세로 한평생…실패 회피 않고 최선 다해
[우신산업을 영호남 대표기업으로 키운 국중하(기계공학·62년 졸) 대표이사 회장]배우는 자세로 한평생…실패 회피 않고 최선 다해
  • 전북대신문
  • 승인 2018.11.2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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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호남비료 시작으로 현대가 와의 인연까지
공학도 출신의 사업가,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문인’
후배들, 기본 충실히 익혀 원하는 분야서 성공하길

‘우신산업’은 한국 경제를 견인해온 자동차 시장에서 부품을 생산하고 있는 기업이다. 51세의 나이에 우신산업 경영에 뛰어들어 회사를 영호남 대표 기업으로 성장시킨 사람이 있다. 바로 국중하(기계공학·62년 졸) 우신산업 주식회사 대표이사 회장이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상속권을 포기하고 맨손으로 사회에 뛰어든 그가 우신사업을 건립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돴다.


국중하 회장은 1956년 전북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1학년을 다니던 중 그는 돌연 입대를 자처했다. 6·25 전쟁 휴전 직후였던 당시 ‘군대를 가는 것은 죽을 수도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던 때였다. 국 대표의 가족들은 영장이 나온 후 입대해도 늦지 않다며 반대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한국 국민이라면 지켜야하는 납세, 교육, 국방 3대 의무가 있는데 교육의 의무는 이미 지켜냈으니 국방의 의무를 지키러 가는 것”이라고 말한 후 군대로 떠났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호남비료’에 취직했다. 당시 국내에서 알아주는 기업이었던 호남비료에서 5년간 근무한 후, 정부가 토목과 건설 등의 설계 기술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설립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에 공채로 입사하게 됐다. 그곳에서 5년 간 귀한 경험을 쌓은 국중하 대표는 ‘극동건설’에서 과장의 자리를 거쳐 ‘현대건설’ 근무를 시작했다.


입사한 지 일 년 되던 1973년, 현대는 그를 현대중공업 선장부장에 임명했다. 기계공학과를 전공한 국 회장에게 조선업은 새로운 분야였다. 그는 일본으로 연수를 다녀오는 등 ‘조선업’ 공부에 매달렸다. 주어진 일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던 국 회장은 정주영 회장에서 큰 신임을 받았다. 어느 날 정 회장은 그에게 26만 톤급 유조선 두 척을 수주하라는 임무를 줬다. 당시 일본을 비롯한 세계 조선업계는 “한국의 조선업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한국을 무시했다. 하지만 국 대표는 포기하지 않았다. 연휴까지 반납하며 선박 수주에 매달렸다. 당시 덴마크에서 영입한 기술자들을 쫓아다니며 홀로 기술을 익힌 그는 마침내 1974년 6월, 길이 350미터에 높이 50미터, 26만톱급의 대형 유조선을 완성해냈다.


그 후 다시 일본을 방문하게 된 국 회장은 그곳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됐다. 그의 추진력과 결단성 그리고 성실성에 일본 역시 감격한 까닭이었다. 일본 영빈관에서 상상할 수 없는 귀한 대접을 받으며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국 대표는 건배 제의를 하며 ‘내가 만약 사업을 하면 이런 것부터 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완주군 동상면에 위치한 ‘여산재’이다.


국중하 회장은 오래 전부터 사업에 뜻을 키우고 있었다. 그를 실현하고자 수차례 사직을 시도했지만 회사에서 좀처럼 놓아 주지 않았다. 오랜 설득 끝에 독립한 그는 정 회장의 지원으로 현대중공업의 선박 의장품을 납품할 수 있게 됐다. 37명의 적은 인원으로 시작한 우신산업의 사업 자금은 모두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현대중공업 재정팀에서 그의 사업을 적극 지원해달라고 은행에 연락해줘 가능한 일이었다. 덕분에 국중하 회장은 수월하게 사업자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사업을 시작하는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 가족을 설득하는 문제였다. 안정적인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벌인다니 가족들은 매우 불안해했다. 하지만 그는 우직한 마음으로 사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우(宇)’와 ‘신(伸)’이라는 한자를 사용해 ‘우주를 펼쳐나간다’라는 뜻의 우신이라는 이름을 짓게 됐다.


그에게 항상 성공의 경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 회장에게도 뼈저린 실패의 경험이 있다. 1980년대 초반, 그가 고선박 해체사업 본부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대형 선박을 정박시켜두고 하나하나 해체시키는 작업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중심을 잃은 배가 침몰해 직원 8명이 사망했다. 당시 영국에 있던 정주영 회장은 국 회장에게 “절대 유족을 만나러 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분노한 유족들의 비난을 우려한 것이었다. 그는 슬픔으로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으며 간신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국 회장은 홀로 빈소를 찾아 유족들에게 뺨을 맞으면서 같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죄를 지었고, 유족들은 소중한 사람을 잃었는데 매를 맞을까봐 그곳을 찾아가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며 “잘못을 빌고 최선의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노력 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4월 ‘멘토 찾기 9번 타자’를 포함해 현재까지 9권의 수필집을 펴낸 문인이기도 하다. 공학도였던 그가 수필집을 쓰게 된 이유는 배움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사업 시작 후 1년이 지나 국 회장은 울산대학교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큰 기업에서 인정받던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한 것도 모자라 석사 과정 공부까지 한다니 인터뷰와 칼럼 요청이 쇄도했다. 방송사와 신문사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수많은 칼럼을 쓰게 됐고, 이를 묶어 책으로 낸 것이 ‘내 가슴속엔 영호남 고속도로가 달린다’이다. 후에도 그는 총 9권의 책을 집필했으며 곧 10번째 책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국중하 회장은 현재 순수자연을 두 눈에 담고 싶다는 열망으로 내년 1월 남극 방문 준비에 한창이다. 새벽 4시면 기상하는 그는 걷기 운동 등의 생활 습관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국 대표는 “아프지 않으려고 건강에 많은 신경을 쓰다”며 “그래야 스스로에게 좋고 주위에도 폐를 끼치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국 대표는 후배들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남겼다. 그는 죽을 때까지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하다며 자신이 현대 정 회장에게 사랑받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학교에서는 기본, 사회에서는 응용하는 법을 배운다”며 “춤으로 예를 들자면 사회에서는 기본 스텝이 아닌, 응용 스텝을 배우는 셈”이라고 말했다. 국 회장은 “후배들이 전북대학교에서 기본을 잘 익혀 사회에서 훌륭한 응용 스텝을 선보일 수 있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윤주영 기자 ju321@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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