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명인을 만나다 42 전태준 대금 명인] 악기는 애정을 쏟는 만큼 소리로 보답합니다
[전북 명인을 만나다 42 전태준 대금 명인] 악기는 애정을 쏟는 만큼 소리로 보답합니다
  • 전북대신문
  • 승인 2018.11.2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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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 소리에 매료돼 입대할 때 들고 가기도
전라삼현육각의 유일한 희망, 전주로 귀향
60년간 해온 음악 정리해 후대에 물려줄 것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가. 꿈을 향해 발을 딛는 것이 두려운가.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전북대신문이 다양한 분야의 멘토들을 만나봤다. 자신이 정한 길에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고 담담히 역량을 키워나가 결국은 ‘명인’의 칭호를 얻은 사람들이 바로 그 주인공. 전북대신문에서 그들의 삶과 열정을 전하려 한다. <엮은이 밝힘>

▲운명 같던 대금과의 첫 만남
취구에 입술을 대자 대금의 맑고 유려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대금과 60년 동반자로 함께 해 온 전태준 명인(74)은 아직도 그를 한눈에 사로잡았던 대금 소리를 기억한다. 주변의 수많은 반대와 힘든 생활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우리 음악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명인을 전주 풍남동의 전라삼현육각보존회에서 만나봤다.


전 명인이 국악을 처음 접했던 1950년대는 대학에도 국악과가 거의 없었던 때로 국악을 접하기 매우 힘들었던 시절이다. 그는 우연히 가입한 국민학교 밴드부에서 피리를 불며 국악과 인연을 맺게 됐고 중학교 신입생 환영식의 한 공연에서 국악에 반하게 됐다. 당시 자매학교였던 전주 농림고등학교인 농촌 예술반(이하 예술반)의 공연이었는데 공연이 끝난 뒤 가슴에서 알 수 없는 벅참을 느꼈다. 그는 바로 예술반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당시 예술반은 고등학생뿐만 아닌 중학생들도 활동이 가능했다. 이를 알게 된 명인은 바로 예술반에 지원 했다.


200명 이상의 학생들에게 삼현육각, 무용, 농악, 판소리 등 종합예술을 가르치던 예술반에 들어서자 담당 선생님은 지원자들 앞에 악기를 쭉 펼쳐 놓았다. 피리에 익숙했던 명인은 당시 큰 피리 같아 보이던 대금을 잡았다. 잠깐 취구에 불어보니 ‘휘’하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은 대금에 입을 대자마자 소리를 내던 전 명인의 재능을 알아보곤 바로 그를 대금 연주자로 낙점했다.


“원래부터 재주가 있던 것인지 어렸을 때부터 우리 소리를 좋아했어. 그때부터 벌써 60년, 나와 대금과의 인연이 시작 됐고 운명 같은 순간이었지.”

▲거센 반대에도 직업 국악인이 되다
명인은 본격적으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전국공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국악인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학자집안 출신인 명인의 집안에서는 국악을 배척했다. 명인은 대금이 마냥 좋을 뿐, 직업으로 국악인을 꿈꾸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대금을 불고 국악 공연을 하는 것만으로 집안의 미움을 샀다. 심지어 “광대가 될 작정이냐”, “집안 망신시킨다” 등의 말까지 들었다.


집안의 거센 반대에 그는 학창시절 전국공연을 다니면서도 음악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명인은 목사가 되기 위해 대전 감리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즈음 가세가 기울었고 명인은 대학을 포기했다. 명인은 “그때 만약 대학을 계속 다녔더라면 대금이 아닌 목사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며 웃음 지었다.
명인은 그 후에 사회생활과 음악을 겸하면서 악기에 심취했다. 그 때 음악 공부는 물론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최선과 금파 선생의 반주에도 참여했다. 그러다 지난 1966년도에 입대를 했는데 당시 군대에도 대금을 가져갈 만큼 대금에 빠져있었다.


제대 후 그는 당대 최고의 국악인이었던 임춘앵 선생의 여성창극단에서 국극 반주를 했다. 이 때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며 임춘앵 선생의 눈에 들어 지난 1969년 상경했다. 이후 대금의 대가인 김동진‧이생강 선생 밑에서 공부를 하며 서울 국악협회에서 활동 하는 등 서울에서 예술 활동을 이어 갔다.


▲전라 삼현육각 보존회가 문화재가 되기까지
명인은 문화재관리국에서 전라삼현육각 재현을 요청받을 때까지 서울 중심으로 활동했다. 삼현육각이란 오래 전부터 관아와 민간에서 전승 돼온 음악 중 하나로 대금과 피리 둘, 해금, 북, 장구 각각 6인으로 구성된다. 지난 1982년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전국의 삼현육각 실태를 조사했는데 전라삼현육각은 대를 이을 사람이 없어 전승이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전주 국악협회는 삼현육각의 명맥을 잇기 위해 삼현육각을 전수 받은 거의 유일한 사람인 명인에게 삼현육각의 재현을 맡아주길 요청했다. 명인은 “문화재에 등록된다는 등의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음악인으로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이를 수락했다”고 전했다. 이후 그는 학창시절 동문들에게 연락을 하며 어렵게 삼현육각을 재현할 구성원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 명인은 지난 1983년 아예 전주로 이주했고 그 다음해 전라삼현육각보존회를 구성하게 됐다.


비로소 지난 1984년 전북예술회관에서 삼현육각의 재현 공연이 열렸다. “그때는 방송국에서도 오고 난리가 났어. 그런데 삼현육각을 살리기 위해 후원하고 도와준다던 사람들이 공연이 끝나고 나니 보존회를 외면했지.” 전 명인은 당시 상황에 안타까움을 내비치면서도 현재까지 ‘전라삼현육각보존회’ 편액을 들고 단 하나의 후원도 없이 단체를 끌고 왔다.


명인은 그 오랜 기간 문화재 지정에도 연달아 실패하고 후원 없이 전라삼현육각보존회를 이끌어오며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회상했다. 생활고를 극복하고 보존회를 꾸려나가기 위해 차린 학원에서 계속 학생들 가르치다 지난 1986년도에 도립국악원이 개원해 전임강사로 재직했다. 그는 15년간 교육에 몸을 담구며 제자를 육성하며 힘든 시기를 이겨냈다. 힘든 시간을 보낸 전 명인에게 보상이라도 하듯 드디어 전라삼현육각보존회가 지난 2011년 9월에 단체 문화재 지정을 받고 올해 2월 달에 개인 문화재에도 등재됐다.

▲‘국악’이 아닌 ‘음악’으로 불리길
대금은 사람들이 어렵다며 접촉하기를 꺼려하는 악기다. 그러나 전 명인은 우리나라 악기 중에 최고의 악기가 대금이라며 대금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그는 촛불을 끌 수 있는 힘만 있다면 대금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두 달 만에 민요 몇 곡정도 불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명인은 “얼마나 애정과 공을 들이는 지에 따라 악기가 소리로 답한다”며 “악기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명인은 대금을 넘어서 국악에 대한 깊은 사랑을 내비쳤다. 명인은 ‘국악’이라는 명칭 자체가 식민지 시대의 잔해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고유한 우리민족의 음악이기에 국악은 ‘음악’으로 불려야한다”며 “지금 우리나라가 알고 있는 음악은 서양음악으로 학교에서도 그게 음악이라고 가르친다”고 한탄했다. 우리 음악 속에는 우리 선조들의 정신과 혼이 들어 있다. 명인은 후손들이 우리 고유의 소리를 국악이 아닌 음악으로 배우기를 소망한다.


명인은 앞으로도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을 더 발굴하고 정리한 후 보다 아름답게 후손에게 물려주는 일에 더욱 매진 할 생각이다.

주연휘 기자 aquanee98@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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