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명인을 만나다 43 - 판소리 수궁가 왕기석 명인]승승장구하면서도 수 없이 방황, 그래도 소리는 나의 ‘임’
[전북 명인을 만나다 43 - 판소리 수궁가 왕기석 명인]승승장구하면서도 수 없이 방황, 그래도 소리는 나의 ‘임’
  • 전북대신문
  • 승인 2018.11.28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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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방문한 국립창극단서 즉석으로 캐스팅
가족의 반대와 경제적 어려움…연습으로 극복
국립민속국악원장으로서 창극 축제 진행하고파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가. 꿈을 향해 발을 딛는 것이 두려운가.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전북대신문이 다양한 분야의 멘토들을 만나봤다. 자신이 정한 길에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고 담담히 역량을 키워나가 결국은 ‘명인’의 칭호를 얻은 사람들이 바로 그 주인공. 전북대신문에서 그들의 삶과 열정을 전하려 한다. <엮은이 밝힘>

▲“18살, 이미 판소리를 할 팔자였나봐요”
“저는 필연적으로 판소리를 하도록 태어난 사람이에요. 팔자소관인거죠.” 40여년을 판소리와 함께 살아온 왕기석(56) 명인은 그가 판소리를 택한 이유에 대해 필연적인 운명이라고 답했다. 인터뷰 내내 우리 음악과 소리에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던 명인을 전주 효자동의 고즈넉한 플라워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다. 왕 명인은 18살이 되기 전까지 판소리와 인연을 맺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들만 6명이었던 명인의 집안에서 이미 2명의 형들이 거센 반대 속에서 판소리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우연히 놀러간 형 왕기창 명창의 직장, 국립창극단에서 왕 명인은 즉석 테스트를 받게 됐다. 그는 “오늘날로 치면 길거리 캐스팅”이라며 “그 자리에서 호평을 받고 내 의사와 상관없이 판소리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왕 명인은 18살에 국립창극단 최연소 단원으로 발탁됐다.


국립창극단은 1962년 창단돼 서울의 국립극장 내에 설립된 연주단체다. 문화체육관광부에 소속돼 있으며 판소리를 기본으로 하는 창극을 무대에 올린다. 명인은 그곳에 들어가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5호이자 국악계의 프리마돈나로 불리던 스승 남해성 명창을 만났다. 그는 아직도 남해성 명창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친자식처럼 대해주며 판소리의 길을 차근차근 안내해준 스승 덕분에 명인은 성장해나갔다. 중요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인 안숙선 명창과도 국립창극단에서 함께 생활하며 많은 도움과 격려를 받았다.

▲집안의 거센 반대에도 판소리의 길 포기 안 해
국립창극단에 최연소 단원으로 들어갔음에도 집안의 반대는 거셌다. 이미 두 형님이 판소리의 길을 걷고 있었고,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당시 판소리 명창은 미래가 보장된 직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우리 국악과 소리에 대한 편견은 엄청났다. 서양문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가 각광받고 우리 국악은 천대받기 시작했다. 왕 명인은 “당시엔 우리 음악을 무당이나 광대들이 하는 음악이라며 무시하는 시선이 많았다”며 “그러한 시선들과 경제적 형편으로 잘 먹지도 못하고 연습할 때 종종 힘이 부쳤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판소리만큼은 놓을 수가 없었다. 집안의 곱지 않은 시선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명인은 묵묵히 연습을 지속했다. 그 결과 그는 1986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 축하 공연에 참여하게 됐다. 당시 국립창극단의 창작 창극 ‘용막골 장사’의 주연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당시 23살, 국립창극단 내 최연소 주인공이었다. 명인은 “당시 국립창극단의 쟁쟁한 명창들 사이에서 주연을 꿰찬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국립창극단 역사상 30대 이전에 주인공을 맡은 경우는 없을 것”이라고 웃음을 지었다. 2년 뒤인 1988년 서울올림픽 문화예술 축전에서도 그는 주역을 맡아 소화했다. 후에도 200여 편의 창극에서 주인공을 도맡아 하던 왕 명인은 국립창극단 최연소 주인공과 최다 주인공 타이틀을 지니게 됐다.


판소리 명창으로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소리를 그만두고 싶었던 순간은 수없이 찾아왔다. 연습이 생각보다 힘들고 잘 되지 않는 날에는 본인한테 울컥 화가 치밀기도 했다. 왕 명인은 “결국 소리를 하는 것은 마라톤과 같다”며 “자기와의 싸움을 이겨낸 자만이 명창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평생 동안 소리다운 소리를 못 하고 죽는 소리꾼들도 많다며 꾸준한 연습과 약간의 타고남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한 번씩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명인은 쉼 없이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다보면 순간 본인의 노래가 마음에 들 때가 찾아왔다. 그는 그 때마다 성취감을 느끼며 탄력을 받아 고비를 이겨냈다. 판소리꾼에게 연습은 필수적인 요소다. 명인은 거의 매일 두세 시간씩 판소리의 연습을 거르지 않는다. 인간의 목소리는 신이 주신 가장 뛰어난 악기지만 간수하기도 가장 어려운 악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있어요. 소리는 하루를 연습 안하면 자기 자신이 알고, 이틀은 연습 안하면 스승님이 알고, 삼일을 연습 안하면 청중들이 안다.” 왕기석 명창의 길에서 연습이란 필연적인 것이다.


▲국림민속국악원장이 되기까지
그는 젊은 시절로 돌아간대도 똑같은 과정을 밟을 것 같다고 말한다. 명인은 초등학교 졸업 후 소리를 시작하기 전까지 인쇄소, 야채 장사, 군고구마 장사, 풀빵 장사 등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왕 명인은 “어려운 시절을 포기하지 않고 내 몸에 녹여 소리로 풀어냈기 때문에 지금 내 소리가 있는 것”이라고 회상했다.


왕기석 명인은 자신에게 소리는 ‘임’이라고 표현했다. 명인은 “누구에게나 가슴 속에 담고 있는 ‘임’이 있을 것”이라며 “한용운에게는 민족이 임이었듯, 나에게는 소리가 그러한 존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리는 내게 가장 소중하고 그리운 존재이며 나를 존재하게 하는 절대자”라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 5월 국립민속국악원의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국악에 대해 더욱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게 됐다. 국립민속국악원 역시 창극을 주로 공연하는 단체이다. 왕 명인은 내년부터 국립민속국악원 주최로 대한민국 창극축제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명인은 “중책인 국악원장을 맡고난 뒤 중요한 무대들 위주로 공연 중”이라며 “모든 장르의 창극들을 모아 공연하고 단체마다 작품을 가지고 와 한바탕 멋진 판을 벌이는 형태로 축제를 진행하고 싶다. 이게 지금 내가 하고 싶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전했다.

▲후배들과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말
왕 명인은 판소리를 하는 후배들에게 너무 성급해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는 “세월의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내 몸에 그것들이 차곡차곡히 쌓일 때 비로소 그걸 소리로 풀어낼 수 있다”며 “소리는 죽을 때까지 연습해야 이루는 과업이다”라고 밝혔다. 문화는 접촉이 필수이기 때문에 꼭 판소리가 아니더라도 우리 국악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공연을 관람하는 등 접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왕 명인은 요즘 젊은이들이 국악에 대한 편견을 버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명인은 “과거의 판소리꾼들은 요즘 방탄소년단과 같은 한류스타였다”며 “200여 년 전 케이팝이 바로 판소리였던 것”이라고 웃음 지었다. 왕 명인은 “장미가 예쁘다고 모든 화단에 장미만 심는다면 멋이 사라진다”며 “음악의 장르에 대해 편식하지 말고 다양성을 추구하려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명인은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설 예정이다. 좋은 소리와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국악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수 있다면 평생 소리와 함께할 생각이다.

윤주영 기자 ju321@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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